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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은 예술 하기

창작자푸른비 이창우 (overdye)
2018-01-25 18: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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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화에서 못 다한 이야기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를 걷어내고 이해를 하기 시작하면 떠오르는 동사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페미니즘은 예술 하기”라고요. 지금 이 마음을 담아 글의 제목을 만듭니다. 현재에서 미래를 살 수 있기에 더없이 멋진 일이 페미니즘 공부입니다. 호모 아르텍스가 되어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와, 예술이다!”

 

이런 말을 하던 순간을 각자 떠올려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지나쳐 왔던 그 많은 불평등과 차별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 사회가 쌓아둔 채 거들떠보지도 않은 진실을 발견합니다. 대중문화로 반복된 획일화된 감각들은 아주 익숙합니다. 그 익숙함을 낯설게 만드는 페미니즘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저절로 내지르는 탄성이 그렇습니다.

 

2017년 12월 8일 한동대 ‘들꽃’에서 주최한 페미니즘 강연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며 특히 주목한 점은 별 의식 없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개인을 향한 폭력입니다. 당시 이명박 정부에서 박근혜 정권을 지나며 공동체에 골몰해 있었고 그 가능성으로 가까이 다가간 책입니다.

 

책을 읽고 글을 남기게 되는 경우를 보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나’를 알려줍니다. 내가 무엇에 주로 관심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죠. ‘한동대 페미니즘 강연’과 관련된 사건들을 접하면서 다시 이 책의 기억을 꺼냅니다. 당시 책을 읽을 때는 크게 주목하지 못한 주인공들, 개개인에 내 마음이 다가가지 못했던 겁니다.

 

우선 첫 번째 이야기를 읽고 두 번째로 다가설 ‘폴리아모리’를 풀어갑니다. 이 용어에 집중하기로 한 것은 지난해 한 청년으로부터 받았던 질문에 답하기입니다. 내가 무척 아끼는 청년이 있습니다. 그와 인연은 20년 가까이 됩니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1학년에 시작해서 지금까지인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그의 질문에 답을 글로 올리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직도 나의 벗으로 동행중인 청년에게 건네는 글임을 미리 밝힙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열린책들. 상, 하 두 권인 이 책은 저자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끼가 수용소 생활 중 1863년 발표한 대표적인 사회·정치 소설입니다. '주인공들 베라 빠블로브나, 로뿌호푸, 끼르사나노프, 라흐메또프는 1840년대 아버지 세대와는 달리 새로운 도덕적 정열을 지닌 합리적이고 유물론적인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구시대의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이익과 사회 전체의 이익이 일치한다는 <합리적 에고이즘>의 신념에 따라서 행동한다'고 역자는 밝힙니다.

 

작품에서 인물들은 그 시대에서 접하기 힘든 ‘특별함’을 겸비한 인물들입니다. 그런데도 그 인물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그 특별함을 삶에 적용해 갈 수 있는 행운아들만이 누릴 수 있기도 했지요. 그러고 보니 우리는 모두 어떤 의미에서 ‘행운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적잖이 행운아라는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내게로 온 그 행운들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모두의 ‘선’이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특별함은 현재 내가 살아가는 시대에서도 여전히 요구되는 것이기도 했기에 위대한 고전이라는 ‘스테디셀러’들의 힘은 역시 보편타당함을 지닐 수밖에 없구나 싶은 거죠. 그래서 우린 고전읽기를 멈추어선 안 되고 특히나 젊은 세대들에게 잔소리처럼 떠들 수밖에 없나 봅니다. 한국사회의 미래가 불투명하게 보이는 원인은 책을 읽는 이들을 주변에서 찾기 힘든 것에 있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요. 부디 스스로 판단해 볼 일이겠지요.

 

소설에서 중심인물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유형들이기도 합니다. 그 인물들이 펼치는 대화는 개인의 삶과 결혼의 의미, 사랑과 자유, 가족과 공동체, 더 나아가 사회 공동의 선을 향한 이야기들로 그 방법론을 작가의 정신에 따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성으로서 결혼은 형식에 맞추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 내용에 있는 것인지를, 타자가 아닌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이었는지를 묻죠. 대부분 여성의 결혼은 그 시대의 사회 관습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지만 작가는 주인공 ‘베라’를 통해 주체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려 합니다.

 

한 세기 반이 지난 우리 시대에도 베라와 같은 선택을 한다는 일은 전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결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 남성도 포함된 것이지만, 주인공의 비중을 여성으로 잡은 것이 우선일 뿐, 그런 여성의 이상을 위해 그런 남성이 없었다면 가능하진 않았겠지요. 결국, 서로의 결이 맞아 이룰 결혼이 격식으로 전락한 결혼이었기에 낳게 된 혼란 같기도 합니다.

 

제정러시아시대가 지나고 볼셰비키 혁명에 의한 사회주의국가 소련이 성립되고 해체되고, 현재는 다시 러시아로 남은 일련의 역사적 흐름을 생각해 봅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개인의 선택과 투쟁은 참으로 지난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시간의 방향에서 각 개인의 여러 모습이 떠오르는데 이 소설이 그들의 현실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점들을 우리는 고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주인공 베라의 삶이 지나가는 과정에는 그녀의 선택과 그것이 가능하게 실현될 수 있었던 주변 인물인 두 남자의 존재를 주목해야 하거든요. 그들은 서로 친구이며 그녀의 두 남편이기도 하죠. "당신은 싫어요. 우리 헤어져요."라고 말할 권리를, 아내의 자유를 똑같이 인정한 두 남자의 선택에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누구 하나의 선택만으로 시작되고 자신의 ‘선’을 향한 신념이 실현되는 사회는 어쩌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그 가능성은 여전히 남겨져 있을 것으로 생각해요. ‘믿음’에 의해 남긴 실낱같은 빛에 스며듦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시작되어야만 하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들에 마음을 쏟는 겁니다.

 

‘공동체’에 대한 가치는 그 어느 때가 되면 반드시 열려야 할 세계라 믿고 있습니다. 베라의 선택은 두 번의 결혼으로 가능했어요. 사랑이 자신의 신념에 반할 때 ‘무엇을 할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는 거죠.

 

이 물음에서 나는 그 해답을 이 소설 속의 여주인공 베라와 그의 남편 로뿌호프, 끼르사나노프를 떠올리며 만납니다. 두 남자는 베라의 갈등에 해답을 건네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소설’에서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 가능성을 저자는 러시아의 사회에 이식시킬 수 있기를 부단하게 노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노력은 분명 러시아의 사회에 영향을 끼쳤음에는 틀림이 없죠. 볼셰비키 혁명에서 그 후 러시아는 레닌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으로 변화했으니 말입니다.

 

‘베라’는 비천한 집안의 예쁜 처녀이지만 자신의 환경에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자유를 선택하여 누구의 아내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로서의 ‘인간’이기를 원했습니다. 나의 것을 공동체와 나눌 것인가, 나의 것을 지킬 것인가에 ‘사회 지식인’의 선택이 있는 것이고, 미래의 변화 가능성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이죠. 기득권층의 자발적인 나눔의 시작은 소수의 '위대한 사랑'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나는 기득권층의 변화를 기다리는 일보나 사회 다수의 개인이 삶의 변화를 위한 선택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훨씬 자연스러운 변화를 가져오는 시작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들이 추구했던 가치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공동체’를 통한 ‘선’을 향한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그 나아가는 시간에는 한 개인의 사랑과 신념에서 어떤 선택으로 만들어진 결과로써 ‘희망’이었거든요. 자신이 믿고 있는 세계와 충돌하는 개인의 모습은 어느 시대에나 마찬가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체르니셰프스끼의 작품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에게 그동안 놓쳤던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을 다시 기억해 내고 꿈꿀 수 있게 해 줍니다.

 

21세기에 살면서도 여전히 친일 근대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관의 경계를 넘지 못하는 한국사회입니다. 내 나라 지성의 역부족을 탓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것 또한 현대를 살아가야 하는 남아진 자들의 선택에 의해 변화될 과제이겠지요. 한 개인으로 선택할 수 있는 더 나은 삶의 시작은 가치 지향의 공감대로 형성된 자발적인 작은 공동체의 움직임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그 믿음과 지속 가능한 행위들을 이 책을 읽으며 더 가다듬는 시간이었나 봅니다.‘

 

'굳이 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그것은 위대한 비밀이며 다만,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라고.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기술 도 필요 없으며 오로지 순수한 마음과 정신, 그리고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의식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그 이상의 비밀은 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지금까지 글이 첫 번째입니다. 이제 시작할 글은 주인공 베라가 자유를 선택하여 누구의 아내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로서 ‘인간’이기를 원했던 것에 집중을 했습니다. 당시 나는 ‘폴리아모리’라는 용어를 몰랐습니다.

 

"폴리아모리(Polyamory)란 여러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다자간(多者間) 사랑, 다자간 연애, 비독점적 다자 연애 등으로도 부른다. 폴리(Poly)는 ‘많은’이라는 뜻의 접두사이며 ‘아모리(Amory)’는 사랑이라는 뜻의 라틴어 ‘아모르(Amor)’에서 온 말이다.

 

베라의 사랑이 가능했던 것은 남편의 보이지 않았던 배려였습니다. 나는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로 단순하게 생각을 했던 거죠. 어차피 사랑은 개인이 선택하면서 만들어지는 관계이기에 현대사회에서 자연스레 도덕규범인 결혼제도를 의식합니다. 일부일처제가 전제되는 혼인제도에서 그 외 사랑은 법적으로는 허용하지 않죠.

 

사람이 살아가면서 법의 허용에서 모든 일이 진행되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법은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만은 허용범위가 달라지잖아요. 사실 양심의 문제로 해결해야 할 일이 일상에서는 더 많죠. 도덕적 해이가 넘치는 한국사회에서 법 때문에 개인이 추구하는 사랑이 비난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나는 폴리아모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는 거죠.

 

내가 원하는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런 나를 이해하거나 인정해주거나 배려라도 할 수 있는 대상이 있을 때라는 게 전제가 되어야 할 겁니다. 그러니 여전히 문제가 될 수 있는 사랑이라는 점도 지나칠 수는 없지요. 폴리아모리를 원하는 개인이 질 책임 문제인 겁니다. 문제가 된다는 것도 개인의 판단과 선택에 맡겨야지 사회에서 또는 집단에서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개인이 선택한 그 사랑이 사회를 와해한다거나 종교에 위협이 될 수 없습니다. 타자를 의식하면서 어떻게 사랑이 가능한지요. 위험한 발상인가요? 내가 믿고 있는 힘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 사랑은 여러 형태로 가능합니다. 단 한 가지 유형으로 불릴 수 없다는 겁니다.

 

개인주의 시대에 살아가면서 여전히 우리는 고착된 문화, 아비투스에서 빠져나오기를 두려워합니다. 지금까지 문화가 자연스럽다고 이해되는 것은 그만큼 세월이 흘러 당연시된 것은 아닐지요. 잘못된 문화라면 바꿔나가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에서 말한 것처럼 새로운 문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인류의 진보는 변화 가능성이지 고착은 아니니까요.

 

이번 한동대 사태는 교내 동아리가 페미니즘 강연을 주최했다는 이유로 관련 교수와 학생들의 징계 절차에 착수하면서 벌어진 일입니다. 한 개인의 사생활을 공공연하게 폭로한(학교 측은 폭로라고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문제의식이 없다고 봐야죠.) 것을 문제 삼고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다수로 일반화되는 성 정체성과 소수로 일컬어지는 다른 성 정체성은 동등한 위치에 놓일 수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 바이블을 근거로 내거는 기독교 입장은 시대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지로 밖에는 볼 수가 없어요. 적어도 사랑을 떠벌이지는 말아야죠. 인간이 즐겁고 유쾌하게 사는 것을 싫어할 신이 있어야 하나요? 종교도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하거든요.

 

나는 폴리아모리스트가 되는 것도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세 주인공으로 작가는 새로운 인류 모습을 찾았나 봅니다. 결혼하기 전에 그들이 한 세 가지 서약은 한국사회에서 하는 결혼 서약과는 다릅니다. 첫째, 사랑할 때 이외에는 각방을 쓴다. 둘째, 서로의 사생활을 방해하지 않는다. 셋째, 아무것도 추궁하지 않는다. 지난해 영화 <박 열>에서 동거 서약을 했던 연인, 후미코와 박열이 생각납니다. 그들이 공감했던 삶, 동료애는 가능합니다.

 

결혼 4년째, 베라는 남편의 대학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인 끼르사노프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 마음을 남편에게 고백하자 자살을 위장하여 종적을 감추고 남은 두 사람은 결혼을 합니다. 세 가지 서약은 이번 결혼 생활에서도 유지되고요. 여기서 현실이 개입되기에 작가는 결혼을 위해 가짜 죽음을 만듭니다. 결혼제도에 변화가 온다면 이런 고통도 필요 없겠지요.

 

죽은 줄 알았던 로뿌호프가 비몬트라는 이름의 미국 사업가가 되어 돌아오고 베라의 친구인 까쩨리나와 결혼합니다. 이후 두 부부는 하나의 공동주택에서 사이좋게 살게 됩니다. 소설이죠. 네, 그렇습니다. 나는 이상적인 결혼을 위해서도 폴리아모리를 존중합니다.

 

폴리아모리스트라는 자신과 화해할 수 없는 사회에서 끊임없이 고통받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작가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끼는 대안 결혼을 제시하며 그것으로 가능한 미래 공동체를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동료애로 결혼할 수 있는 시대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자, 이제 우리도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가?”로 이해해 가는 과정이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압니다. 1996년 ‘된장녀’라는 말부터 이어진 2012년 메르스 사태에서 다시 온라인상에서 뜨거웠던 메갈리아 미러링과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까지 ‘혐오’는 분명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랑하기를 방해합니다.

 

“여러 사랑을 포용할 수 있다면 왜 사랑하는 사람끼리 이별해야 하나요?”

 

체르니셰프스끼가 제시하는 새로운 인류인 나는 이렇게 묻습니다. 사랑할 수 있을 때 마음껏 사랑하면 더 좋은 일이잖아요. 비 독점 다자 연애는 어려운 사랑입니다. 나 혼자만 일방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죠. 내 애인을 ‘비 독점’할 수 있으려면 애인이 다자 연애 하는 것을 수용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죠. 그 둘 다 ‘다자 연애’에만 방점이 찍히면 이별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이 책에서 남편이 비 독점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사랑의 완성은 이별로 가능해지는 ‘순간’일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이별할 필요가 없다면... 독점과 소유욕이 낳은 집착. 전통 결혼 규범과 비 독점과 비 소유, 움직이는 사랑이 공존할 수 있는 문화도 존중할 수 있다면 개인의 선택이 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란한 성이 아니라 소유욕을 해방시키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반드시 폴리아모리스트가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 일 중 하나가 집착이잖아요. 그대와 나, 그리고 우리로 살아갈 아름다운 동행이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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