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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세상 나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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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비 이창우 (mediamall)
2018-08-17 16:5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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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토니 케이 감독의 <디태치먼트>

 

[Detachment]

주요뜻 ① 분리 ② 초연 ③ 무관심

 

 

뉴욕 교외에 있는 어느 고등학교에 헨리 바스가 임시 교사 자격으로 부임한다. 그는 한 달 동안 아이들을 맡는 임시직 교사이다. 현재 이 고등학교는 주변의 문제아들이 모여든 곳으로 설정되었다. 이 영화는 겉으로는 마치 '교사와 학생의 대립'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는 것처럼 진행된다. 나는 '대립'이라 보지 않는다. 이미 전제된 많은 것들이 드러나지 않기에 대립이라 생각하기에는 무리였다.

 

각자 그 공간이 필요해서 모여든다. 학교는 단지 그렇게 묘사된다. 학교의 존폐에 매달리는 교육 의원도 교장도 선생도 비슷하다. 개인의 이유로 학교는 공간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학생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공부하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피하려고 학교라는 공간에 들어온다. 그 필요성에 분명 사람은 없어 보인다. 교육 시스템은 기계적으로 진행되고 학교 평가는 성적으로 학교의 존폐를 결정하는 전부이다.

 

한국사회 교육의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학생들의 언행도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학생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은 일상을 돌아 보면 별 차이 없다. 다만 한국의 학생들이 좀 더 부자유스럽기는 하다. 아마도 사회에 진득하게 굳어진 형식의 딱지 덕분일지도 모른다. 다른 나라의 교육 환경을 통해 함께 스스로 놓인 자리를 고민할 수 있다면 싶었다.

 

내부에서 곪아가고 있는 학교 문제를 드러내어 해결할 방법을 찾기 위해 지속할 수 있는 관심이 우선되어야 하겠지 싶다. 이 사회에서 학교 문제가 논의되는 데 좀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를 던지는 이 영화는 나에게는 답답함을 더 부추겼던 것 같다. 나름대로 영화 제목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 현실에서 묻기 시작해 본다. 이 말에 깃든 세 가지의 뜻은 결국,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모일 수 있었다.

 

[분리]

 

이 영화에서는 학교와 학생, 학교와 교사, 학교와 학부모가 분리되어 있다. 아이와 부모, 가족 공동체와 사회의 분리. 개인 간의 분리. 이 세계의 분리된 현실이 학교 안과 밖에서 집단의 문제 이전에 분리된 개인의 문제를 각 자의 목소리로 펼쳐 놓았다. 교육자로서 사명감으로 교사가 되고 싶어 학교에 오는 교사도 없다. 그들은 직장으로 개인의 필요에 의해 그곳에 있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 맺기는 애초에 가능하지 않은 곳이 학교였다.

 

그럼 누가 나를 이 학교와 사회에서 분리하지? 또는 무엇에 의해 나는 분리 당하지? 표면에 드러나는 분리는 사회 제도로 일어난다. 하지만 그 사회 제도는 필요 때문에 선택할 수도 있지만 물론 다른 선택도 가능하다. 그런데도 굳이 사회 제도권으로 들어가는 선택을 하는 것은 내일을 향한 불안과 현실의 이해관계에 있다. 그렇다고 하여 사회제도가 잘 갖추어져 있다면 본래의 장소로써 학교가 가능하다는 의미일까.

 

[초연]

 

나와 당신이 하는 그럴싸한 변명, 초연하게 살 것만 같지만 그렇지 못한 나의 이야기 또는 당신의 이야기. 자기 정당성이란 함정을 파 놓고 초연함을 말할 수 있는 나. 또 어쩌면 당신이 있다. 삶에 초연해질 수 있을까. 바꿔 말하면 인간이 인간에게 초연해 질 수 있을까. 철학과 사회 담론의 패러다임전환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삶을 궁핍하게 몰아가는 이 사회 구조에 과연 초연하게 지날 수 있을까.

 

이 영화에서 임시직 교사인 헨리는 냉정함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그는 그저 무언가를 가르치다 떠나면 된다. 초연하다고 말할 수도 있는 그의 표정은 영화 내내 어둡다. 그의 얼굴만으로도 학교의 그는 교사로서 초연하게 보이기도 한다. 실상은 자신의 문제로 이미 사회와 분리된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약간의 연민이 있다. 자신의 처지에서 주변인을 완전히 외면하지는 못한다.

 

 

[무관심]

 

십 대 가출 소녀에게 보이는 연민, 학교와 집에서 뚱뚱하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다 무시당하는 외톨이인 메레디스를 대하는 그의 행동은 작은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쓰레기 더미의 학교도 쓰레기통에 처박혀도 될 인간에게도 자신을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적어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자각할 순간이 필요함을 보여 준다. 헨리는 무관심할 수 없는 스스로와 싸우고 있었다.

 

내가 세계와 분리되면서 초연을 추구하는 것으로 여기고 싶은 자기 정당화 과정을 통해 이 세계에 무관심해진다. 내가 있는 이 자리와 이 순간만이 전부가 된다. 내 곁의 당신이 굶어 죽어가도 내 부모가 치명적인 병으로 나를 간절하게 바라보아도 나는 무관심으로 이렇게 잘 살 수 있다. 그리고는? 무엇이 있을까. 나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죽음 앞에 다가갈 때 그들과 같은 손짓과 눈짓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역시 당신은 행운아이다.

 

 

[그래서 나와 당신은]

 

어떤 상황에 놓이는 경우, 그동안의 자신이 축적한 가치들이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삶의 전 과정에서 행운이란 이런 것이 해당할 지 모른다. 좋은 부모와 적당한 부와 주변인이 나의 삶에 적잖은 영향을 준다. 그 힘에서 나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삶의 전략이 필요한 부분이 되겠다. ' Detachment'의 세 가지 뜻은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다고 본다. 그 어느 하나도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어렵다.

 

나는 분리되거나 분리해 버리고, 초연하거나 초연해지려 한다. 그리고는 세계와는 무관하게 나아가 무관심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달콤한 선택인지 느낄 수도 있다. 그 삶에 만족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온갖 것에서 행운아일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행운에 맡기기에 내 삶은 너무 짧을지도 모르니까. 난 행운을 기다리기보다는 주변에 즐비한 사람을 느끼려는 선택을 했다.

 

공간의 효율성과 존재감에 사람은 어디에 의지해야 했던가. 그 공간에 홀로 선 나와 당신이 공감하는 시간으로 존재감을 드러낼 공간이었으면 싶다. 당신과 나의 영혼이 함께 춤을 출 수 있다면 그런 시간은 가능하다고 믿는다. 학교가 공간이 아니라 공감으로 다가오기를, 이 세계에서 당신이 내게 건넬 연민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공감의 한 행위이기를 바라며 무겁지만 열어젖히고 나와야 할 이 영화를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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