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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세상 나누기]

이승의 어떤 죽음

창작자푸른비 이창우 (overdye)
2018-08-19 09:2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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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트리크 모디아노는 『신원 미상 여자』에서 세 가지 에피소드로 유럽의 전후 역사와 상황에서 진행되는 개인들의 내밀한 불행을 제시하더군요.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에 이르는 프랑스의 시대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 그들의 삶은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한국사회에서는 하루에 얼마나 ‘신원 미상 인간’이 발생할까요.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물음이었습니다. 신문의 부고란에 오르는 이들에겐 이름이 있죠. 사회 제도상으로도 이름이 없는 이들은 분명 없을 텐데 사회에서 붙여지지 못한 수많은 ‘신원 미상’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신원 미상’으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현재, 기약 없는 기다림,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시간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놓여 있습니다.

 

 지금, 이곳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설정된 세계 한가운데 놓여 표류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곳에서는 ‘신원 미상’으로 처리될 수 있는 ‘인간’으로도 존재함이 위태롭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차례를 기다리는 느낌이랄까요. 그것들은 스스로 ‘신원 미상’이고 싶은 충동마저 건넵니다. 익명으로 살아간다는 것, 낯선 곳에서 나를 모르는 이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죽음으로 나타나게 된다면, 신원 미상인 ‘나’인 거지요. 익명성이 가능한 세계, 그 익숙함은 어쩌면 내가 살아가는 이 시간대의 또 다른 이름은 아니었을까요. 더는 낯설지 않게 어둠의 기억들이 뉴스에서 여전히 줄을 잇습니다.

 

 지난 14일 안희정 전 도지사가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그의 성범죄는 수행비서 김지은의 미투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한때 대선 후보로 오르내리던 꽤 주목받던 정치인이지요. 지극히 개인적인 일들이 공론화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었습니다. 일상화된 권력형 성범죄. 사회 구조에 의해 내재화된 성향이 개인의 의식을 표면으로 드러내게 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폭력에 반응하는 아비투스에 의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버리는 데 익숙해진 것일까요. 이성으로 똑똑해진 현대인에게 감정을 배제한 관계 맺기가 서툴어진 것인가요. 진심을 잃은 사회의 모습. 가해자의 무죄 판결은 사법부 권위를 잃는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지만요.

 

 

 누군가의 죽음이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게 삶이던가요. 내 가족, 나와 가까운 누군가가 아니라면요. 카메라는 예순의 절반이 넘은 한 여인의 시선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을 따라갑니다. 이창동 감독 영화 <시>는 첫 장면에서부터 질문을 던집니다. 그 작은 아이는 왜 강물에 그리 떠밀려 온 것일까요. 영화가 진행되는 시간, 마음 한쪽에서는 강물에 몸을 던진 그 소녀를 계속 끌어안고 있어야 했습니다. 이 영화는 어떤 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갈 것인가 나름 상상해가며. 시인의 감성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주인공의 일상에 조금씩 시선이 모여지더군요.

 

 어느 날 시를 만나게 된 그녀의 마음을 이 영화에선 아주 서서히 꺼내놓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 녹아 있는 시를 언제부터인가 잊고 있었던 거지요. 조용히 삶에 스며있어 어루만지고 바라보고 쉼 없이 대화를 나누어야 했던 것인가 봅니다. 시인들은 바로 그런 시간을 겪어내고 그토록 가슴 울리는 시어들을 탄생시켰나 봅니다. 시는 삶처럼 날 끌어들이고 있었지만 무디게 살아온 내가 미처 못 알아차렸던 겁니다. 내 삶이 시로 쓰이고 있다는 그 아름다운 사실을 말이지요. 시에 담을 마음은 어떤 풍경들로 열릴까 하는 생각은 이미 내 삶에 담긴 시였어요. 이런 삶의 시를 당신도 품고 있을까요.

 

 한 편의 시를 완성해 놓을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그녀에게 갑자기 찾아온 여중생 자살사건의 배후에 있는 손자의 일이었습니다. 적어도 진실은 알려질 수 없고 표면적인 사실을 감추려고만 하려는 이 시대의 암울하고 비인간적인 행태를 그녀가 알게 되고 시로써 소리 냈던 거지요. 내가 살아가는 이 나라에서 일어난 세월호 참사가 아직도 무거운 진실을 감추고 있기에 이 영화는 보통의 영화와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소녀의 죽음에 진정한 사죄의 의미를 저버린 이 사회의 분노를 ‘느낌’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지요.

 

 중학교 3학년 여자아이가 자살했습니다. 같은 학교 남학생 여러 명에게 성폭력을 받아왔던 겁니다. 가해자들의 부모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나누는 이야기는 보상금 문제였습니다. 학교는 은폐만을 생각하고 피해자에게 합의금으로 일을 끝내려고 합니다. 문화원에서 시를 배우기 시작한 주인공, 할머니는 가해자 중의 한 명인 손자와 함께 살지요. 손자의 일상은 소녀의 죽음 이후에도 게임과 만화영화와 음악으로 보통과 같은 일상으로 이어집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해자들의 부모들과 은폐하기에 급급한 학교의 모습, 그와 함께 이 사회의 무관심을 보여주는 가해자의 멀쩡한 일상에서 일그러진 마음을 계속 쓸어내리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주인공 할머니는 알츠하이머의 초기라는 진단에 주변을 정리합니다. 죽어도 영혼이 이 세계를 떠날 수 없는 소녀의 슬픔에 시로써 한 영혼을 달래주는 것으로 위로하고 그녀는 사라집니다. 그리고 진실을 은폐할 수 없음에 항거한 그녀의 결단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요. 손자가 연루된 소녀의 죽음에 가해자들의 진정한 용서를 소녀의 엄마에게 구해야만 했던 것이겠지요. 진실을 외면할 수 없는 그 마음이 작은 위안이 되는 영화였습니다.

 

 영화는 이승에서 일어난 어떤 죽음을 만나러 갑니다. 중학교 3학년 여자 애가 자살을 했습니다. 일기장에 죽기 몇 달 전부터 같은 학교 남학생에게 성폭력을 당해왔다고 써놨답니다. 여섯 명이 실토했답니다. 처음엔 두 명이 같이 시작했다가 친하게 어울리던 4명이 같이 가담했답니다. 소년들이 처음에는 강제로 한 게 아니라더군요. 여자애도 좋아서 했다고 하더군요. 가해자 부모들이 더 뻔뻔합니다. 피해자 가족을 달래기 위해서는 결국 위자료가 문제군요. 위자료. 그 어떤 의미로도 용서를 구하는 일은 생각조차 안해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은 언제였을까요. 그 물음을 던지는 순간 수많은 시간이 펼쳐질 수 있다면 행복하기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성공한 것일까요. 행복하기 위해 하는 일들이 나를 멀리까지 내몰아 왔던 것은 아니었던지 이 영화는 묻고 있습니다. 김용택 시인의 詩 강좌를 영화에 끌어들여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詩를 꺼낼 수 있게 합니다. 내 가슴에서 시 한 구절을 꺼낼 수 있다면 이토록 미상의 죽음에 태연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이 듦으로 잃어버리는 명사들은 어쩌면 이 땅을 떠나기까지 다 버려도 될 것들 아니던가 싶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담은 시어로써 남겨진 말들이 좀 더 희망적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지식이 많다고, 살아온 시간이 길다고 하여 결코 지혜롭다고는 할 수 없듯이 생각해 보면 어른이라는 물리적 나이가 모든 판단에 합리적이고 절대적일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은 SNS를 통한 여러 방식으로 개인의 선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서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또한,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읽고 공감을 하기도, 그저 습관처럼 지나치기도 하죠. 이 또한 일부이겠지만 끊이지 않는 심한 갈증이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소통이 불가능한 시대에서 폭력성은 이 영화에서처럼 누군가에게는 강제되는 것이지만 그런 의식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인가 싶습니다. 용서받으려는 사람이 없는 시대, 진정한 화해가 사라진 시대입니다.

 

 차마 이 세계에 인간다움은 사라졌다고 생각할 수가 없군요. 내가 마음을 다해 손을 내미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면 보이지 않았던 길은 새롭게 생겨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 어느 날에, 그 길은 나만의 길이 아니라 주위의 모든 이들이 왕래하며 만들어질 세상의 것이 되겠지요. 이런 아름다운 동행을 꿈꾸는 일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너무 처참해집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효과가 없다고 해도 나의 마음을 멈추지 않는다면 좋은 세상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그 믿음을 지켜내고 싶네요. 나에게서 당신에게로 또 누군가에게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소통이 단절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대상의 말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거나 그저, 이해한다는 것으로 끝나 버리는 경우는 아닐까 싶습니다. 이성밖에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는 거죠. 내 마음과 당신의 마음이 공감을 이루는 과정이 사라진 말은 그저 허공에서 울리는 소음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의 말이 당신의 마음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고 순간적이고 즉각적인 반응 이외에는 남겨지는 울림이 없는지도 모르지요. 이 영화에서 시인이 “시는 죽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시는 죽었을지 몰라도 시인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어른들은 자기 생각을 아이들에게 잘 표현합니다. 대부분은 내가 바라는 것을 표현하는 데 익숙할 뿐이죠. 아이들은 듣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같거나 그렇지 않거나 상관없이 그저 듣습니다. 사실은 그때뿐인 겁니다. 어른이 요구하는 것은 대체로 반복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실, ‘어른’이라는 말에 규정된 삶은 없지 않던가요. 사전적 의미는 ‘다 자란 사람’ 일뿐이죠. 물론 여러 개의 의미가 있지만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누구나 어른이 된다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어떤 어른이냐가 아이들에게 다르게 느껴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과연 어떤 어른이지?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어떤 마음을 건네고 있지? 당신과 함께 고민해 보고 싶습니다.

 

"시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시를 쓰겠다는 마음이 어려운 겁니다."

 

영화에서 특별 출연한 김용택 시인이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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