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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세상 나누기]

사람을 살리는 '협상'

푸른비 이창우 (mediamall)
2018-08-25 09: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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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브릿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십 년이다. 나는 십 년 전만 해도 이맘때면 아버지의 고향, 평양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사회는 민주주의의 자유로움에 요동치고 있었다. 그 자유로움은 당시의 언론 환경을 주목하면 쉽게 드러나는 광경이다. 지금의 주류 언론들이 국민정부와 참여정부를 얼마나 까댔던지 그때를 돌아보면 지금보다 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그들은 자유를 만끽했다.

 

언론의 공정성은 그때도 편향성을 띄고 있는 현재의 주류 언론들이 국민을 호도하는 데 일조했다. 그래도 제 역할을 하는 공영방송이 존재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두 협상가 덕분이라 생각한다. 고인이 되신 두 대통령을 협상가라 부르는 것은 이 영화를 보면서 한 개인의 측면으로 접근하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신념이란 것에 전제되는 ‘가치’를 기억하고 싶음이기도 하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라는 것만으로 충분히 마음을 사로잡는 영화도 드물 것 같다. 그의 영화를 보면 마음 깊은 곳에서 전해지는 잔잔하게 번지는 감동들 덕분이겠지. 이 영화 역시 그런 개인적 기대감을 채워주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이념의 시대부터 현재까지 과연 국가와 개인은 상호 신뢰로 맺어지는 관계일까 하는 의문을 품어본다.

 

신뢰가 없는 국가를 위해 개인의 헌신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개인의 신념이 무시되는 사회의 내일은 반목과 멸시밖에 남지 않을 것 같다. 개인의 신념이 생존과 연결될 때 그 선택 앞에서 목숨을 걸 수 있다는 것이 그리 많지 않은 이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될까. 설사 국가가 나를 믿고 지켜주지 않았다 해도.

 

"걱정 안 돼요?"

"걱정한다고 달라질 게 있소?"

 

변호사 도노반의 물음에 스파이 아벨의 대답은 너무 초연해 보여서 그것이 그가 가진 굳은 신념의 표현일까 싶었다. 1957년에 검거된 소련 스파이 루돌프 아벨의 변호를 맡게 된 변호사 제임스 도노반의 역할도 국가를 위해 선택해야 하는 일이었다. 도노반에게는 여론의 질타와 생명을 위협하는 협박까지 가해지는 상황이 되기도 한다.

 

국가는 개인을 내세워 정치 전략으로 국가의 이미지를 위한 선택이었지만, 도노반은 자신의 신념과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 국가를 위한 일로 시작되었지만, 그의 신념은 국가가 외면한 한 개인의 인권을 포기하지 않는다. 동독에서 공부하다 장벽이 세워지는 그때 운이 없게 감금된 대학생도 포함되도록 하는 극적인 협상을 성공적으로 끝낸다.

 

루돌프 아벨이라는 신념에 찬 한 개인을 국가는 어떻게 대접할까. 영화에서 보여주는 마무리는 아벨이 말한 두 가지 모습에서 그를 포옹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 뒷좌석에 앉히는 것으로 대신한다. 마지막까지 아벨을 좇는 도노반의 눈길에서 나는 국가와 개인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본다. 그래서 국가에 헌신할 수 있는 개인의 신념은 강제되는 것이 아님을.

 

미국과 소련의 냉전 시대, 적대감으로 가득했던 그 시대를 보면서 대한민국의 상황을 돌아보게 한다. 지난 역사에 대한 감회 정도였으면 하건만 현실에서 과거의 암울함을 맛보고 있다는 것, 신념에 찬 협상가를 떠올리는 것으로 위안으로 삼아야 한다니. 국가를 나의 적으로 여기게 된다면 내가 살아남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든 국가와 싸워야 하는 것이 맞다.

 

이명박 정부에서 현 정부까지 계속 제기되는 문제는 불통이었다. 집권 이후 드러나는 국정원 사태부터 헌정 사상 유례없는 정당 해산,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 강행, 최근 사드까지 정부는 그야말로 외통수다. 공론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언론 호도와 반공주의라는 케케묵은 이념을 내세워 분열을 조장하는 행태들은 국가라기보다는 극단적 광기로 채워진 한 집단과 흡사하다. 대통령의 ‘외교’라는 단어는 급기야 ‘외유’로 대체되어 그 정점을 찍었다.

 

현대 민주주의 이론을 살펴보면 ‘심의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한 방법론으로 제기해 왔다. 사회적 접착제로서 의사소통의 잠재력에 집중한 이론이기도 하다. 문제는 의사소통이 없다면 불가능한 이론에 불과한 거다. 하기는 말 잘 듣는 국민을 만드는 데 주력한 역사를 되짚어 보면 지금의 정부가 강행하는 일방통행은 당연한 순서인 가도 싶다. 민주주의도 자명하지 않은 나라에서 심의 민주주의는 한갓 타령에 불과하지.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목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정부가 들어선 지 8년째인가. 설득이란 말을 아예 삭제해 버린 정부이다. 아니 설득할 수 없는 일만 저지르는 정부가 맞겠지. 이성의 공적인 사용은 불가능한 정부이다. 이 영화에서 ‘협상’이란 매력적인 말을 읊조리며 한국의 현실이 더욱 초라하게 다가온다. 지지리도 인물 복이 없구나.

 

국가는 억누르는 지배방식에서 생산하고 길들이는 권력형으로 지배방식을 전환했다. 우리는 일종의 자동 통제 시스템에 익숙해져 버린 것 같다. 기술문명이 발전해 오면서 국가는 처형과 같은 가혹한 신체적 형벌 대신 신체를 길들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자본과 미디어의 이미지, 성공 신화로. 어려서부터 감시와 통제에 길들어 있기에 마치 일상성의 부자유는 인식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자유로운 주체라는 자긍심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현대에서 자유로운 개인은 사라진다. 지배 권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컨트롤러에 의해 조종되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는 거다. 독재시대를 살아왔으면서도 그것이 독재였는지도 모르는지 알면서도 그러는지. 여전히 광장은 군중의 소리 없는 깃발이 넘친다.

 

습도가 높은 실내에서 제습기 가동마저 덜덜거리는 밤이다. 비라도 쏟아져 눈이라도 시원했으면 하는 심술을 부린다. 애꿎은 하늘 탓만 한다. 제 멋대로 인 정부에 협상가는 존재하지도 필요하지 않은 현실, 결국 시민이 나서야 하겠지. 나와 당신, 작은 공동체의 참여와 연대만이 출구이다.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해방정국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지 않은가.    

 

2016.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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