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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세상 나누기]

민주주의라는 달콤한 유혹

푸른비 이창우 (mediamall)
2018-08-28 09: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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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진짜 ‘쓰레기(Trash)’는 누구? 자칭 ‘기레기’라는 말로 언론 역할의 부재를 지칭한 한국사회에서 던지는 기자정신에 관한 질문은 이제 좀 싫증 납니다. 부패한 정치권력의 남용과 횡포, 정부의 이름으로 가하는 국가 폭력은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니까요. 과연 이곳에 ‘정의’가 있기는 한 것일까를 생각하면서 정의를 상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가능해진 현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유일한 평등권인 1인 1표. 투표의 힘을 접었던 그대, 좀 뜨끔하신지요.

 

어쩌면 나도 관료의 부패를 조장하는 데 한몫을 하는 것은 아닌가 슬그머니 작아지기도 합니다. 부당한 현실에서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공동체는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냉소가 팽배해지는 한국 사회의 미래, 암울합니다. 최근 막장 드라마 같은 일이 대한민국 국회 인사 청문회에서 또 일어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공직자로서 부끄럽지도 않은지 대통령의 임명을 넙죽 받아들이고 청문회에 등장하는 당사자는 이해 불가능입니다. 그런데도 전자결재 통과! 우린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민주주의는 숨 막히다!

 

 

영화는 14살 소년 하파엘의 손에 총이 쥐어져 있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벌벌 떨며 방아쇠를 당겨보려는 작은 꼬맹이 하파엘과 옆에서는 친구 가르도의 목소리도 들려오고요

 

어서 죽여!

 

그리고 빠르게 전환되는 하파엘의 독백 장면이 나옵니다.

 

당신들이 이 비디오를 보고 있을 때 난 이미 죽어있을지도 모른다.

 

이 독백 장면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는 영화가 끝날 즈음 알게 됩니다.

 

쓰레기 처리장에서 일하는 주인공 소년들은 정치인의 비리가 숨겨진 지갑을 줍게 되면서 부패한 정치인과 공권력을 상대하게 된 겁니다. 목숨의 위협에서 아이들은 부패에 맞서 행동하고 기억하는 일을 했지만 우린 잘 잊어버리곤 하죠. 이 사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은 또 무엇이 쓰레기로 전락한 신문과 종편에서 정권의 나팔수에 의해 떠들어대고 있는지 관심도 없잖아요.

 

스티븐 달드리의 이 영화에서 쓰레기 처리장은 아이들의 일터이고 살아가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빈민에게 누군가 버린 쓰레기는 삶을 존속하게 하는 생산품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떠난 아이들이 복잡한 도시를 예측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날고 뛰어다닙니다. 빈민가의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잘 다듬어진 녹색의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느라 뛰겠지만 말입니다. 한국사회에서 아이들이 밤이면 자동차에 실려 또는 학원 버스에 실려 이리저리 분주한 것과 대치되기도 합니다. 이 아이들은 왜 뛰어야만 했을까요?

 

쓰레기 더미에서 지갑을 발견한 그 순간의 행운은 잠시였죠. 곧 경찰이 들이닥쳐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걸며 지갑을 수소문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지갑에 중요한 무언가가 있음을 직감하게 되는 것이고 주인공은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가집니다. 소년들은 하수구에 사는 일명 ‘들쥐’라는 친구에게 지갑을 안전하게 맡기지만 지갑을 찾던 경찰들은 그들의 행동에 수상한 낌새를 눈치챕니다.

 

경찰은 세 소년을 쫓고 우리의 주인공인 하파엘을 납치해서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아갑니다. 과거 독재 시절 남영동 대공 분소던가, 그곳이 막 떠오릅니다. 하지만 국가 폭력에 맞서는 본능, 아마도 이것이 사회적 약자들이 놓인 현실에서 발휘되는 목숨을 건 용기, 저항일 겁니다. 내 문제가 아니었던 사회 문제들이 갑자기 나만의 문제가 되는 현실이 되기도 하니까요.

 

 

영화의 첫 장면인 동영상 촬영으로 소년들을 도와줬던 외국인 선교사는 궁금해서 묻습니다.

 

“왜 이런 모험을 감행하는 거지?”

“그냥 이것이 옳으니까요(Because its right).”

 

나는 부패한 정치인이 저지를 수 있는 권력 남용은 영화이기에 더 극대화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영화이기에 보여줄 수 없는 세 소년의 심리상태는 그 어떤 영상으로도 대체될 수 없으니까요. 거대한 권력의 힘 앞에서 스르르 무너져 내릴 한 개인의 두려움은 상상조차 하기가 겁이 나니까요.

 

극단으로 치닫는 공포 앞에서 의연하게 고통을 참으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킨다는 것은 어렵고 두려운 일입니다. 영화에서 지갑의 주인인 안젤로가 목숨을 걸고 쓴 아이들이 읽었던 비밀 편지는 부패한 정부에 저항하다 감옥에 갇힌 그의 삼촌에게 전해집니다. 그 글의 내용은 희망의 메시지였죠.

 

우리 세대의 정신이

다음 세대에 넘어갔다.

 

정의를 향한 그 글귀가 한국 사회에서도 재현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쌓인 그것이 많아지면 조금 더 정의로운 사회가 될 테니 말이지요. 마이클 샌델 정의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그저 내 양심이 허락하는 일이 정의가 아닐지 싶네요. 정의의 투사가 되고 싶으면 행동하는 거고. 투사가 많아지면 혁명 아니겠어요? 뭐, 그렇다고요.

 

인류는 신들에 의지하던 나약한 피조물의 위치에서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인간으로 문명을 이끌어 왔습니다. 하지만 도구로 전락한 이성의 야만성은 지나온 역사에서 국가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일종의 광기와 같았습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일본의 난징대학살, 미국의 베트남전 등, 정의를 배반한 일들은 도구적 이성이 만든 거대한 악이었습니다. 국가의 탐욕으로 무장한 야만의 세력들은 인간성을 파괴했던 겁니다.

 

왜, 국가는 인간다움을 발휘하며 공공의 선을 향해 살아가는 구성원들에게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할까요?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 절차에 의한 정당성을 강조하고, 자유와 공정성을 외쳐야만 합니다. 국가를 이끌어 가고 있는 자본을 우상으로 삼는 개인들의 탐욕에서 나온 이기심이 보여준 도덕적 해이도 한몫 단단히 했습니다.

 

정의의 가치는 여전히 국가권력의 폭력과 남용으로 짓밟히고 있습니다. 국가안보를 내세워 분단의 현실을 이용하는 정부는 무관심한 어제의 내가 지금을 만든 것과 다름없다는 자책부터 시작해서 가치관의 혼란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는 학벌과 스펙, 연줄이 중요함을 주입시키며,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행동들을 자체적으로 검열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고 있거든요. 이런 사회적 자아의 이미지에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적으로 국가가 있다니. 우리 사회에서 정책 경쟁이 실종되고 ‘색깔론’이라는 ‘프레임’이 한국사회를 잠식해 버리는 것은 지나온 역사의 교훈을 외면했기 때문이겠지요.

 

역사인식의 부재,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성찰하지 못한 일을 새겨야만 합니다. 그것은 기득권을 누린 자들이 언론과 결탁하여 만들어 온 ‘불편한 진실’ 임에 틀림없어요. 정의가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나는 정의를 지키려 해도 지킬 힘이 없다는 사실만을 확인하게 됩니다.

 

나의 생존을 위해서 개인의 정의로운 선택은 결코 쉽지 않다는 거죠. 국가안보와 정의, 두 가지가 가능할 수 있는 사회는 인류의 역사에서 존재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군요. 영화에서처럼 부패한 관료가 망할 일은 없는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자유라는 이름을 달아 맨 달콤한 유혹 같기만 합니다. 내가 역사를 알고 깨달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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