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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세상 나누기]

괴물이 된 국가

푸른비 이창우 (mediamall)
2018-09-01 18: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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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둘레를 순환하는 많은 인공위성, 이 위성들은 초정밀 카메라를 부착하고 있어서 땅 위에 세워진 자동차의 번호판 번호를 식별해 낼 수 있다. 기술 문명이 발전해 오면서 국가는 처형과 같은 가혹한 신체적 형벌 대신 신체를 길들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억누르는 지배방식에서 생산하고 길들이는 권력형으로 지배방식을 전환했다. 우리는 일종의 자동 통제 시스템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자유는 천부적 권리며, 자유가 인간의 기본권이라는 것에 문제를 제기할 이는 없다. 다만 다른 가치에 비해 우선순위가 달라진다. 어려서부터 감시와 통제에 길들어 있기에 마치 일상성의 부자유는 인식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자유로운 주체라는 자긍심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현대에서 자유로운 개인은 사라지고 지배 권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컨트롤러에 의해 조종되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영화 <Enemy of State> 토니 스콧 감독

 

 

1. 국가기관의 권력 남용으로 빚어지는 현상들

 

이 영화는 감청 관련법을 둘러싼 국가기관의 권력남용을 그리고 있다. 변호사 로버트 딘은 자신이 맡은 노조 관련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마피아 보스와 담판했다가 오히려 증거물인 비디오테이프를 내놓으라는 협박을 받는다. 딘은 아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란제리 가게에 들렀다가, 대학 동창인 대니얼을 만난다. 대니얼은 우연히 국가안보국 요원이 국회의원 살해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가 쫓기던 중이었다. 대니얼은 디스크를 슬쩍 딘의 쇼핑백에 넣었고, 거리로 나섰다가 죽임을 당한다.

 

국가안보국 부국장인 레이놀즈는 국가안보국의 도청행위를 승인하는 법안에 반대하는 의원을 제거하고 자살로 조작한다. 하지만 우연히 살인 현장을 찍은 디스켓이 변호사인 딘의 수중에 넘어가면서 딘의 사생활은 모조리 파괴된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그는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국가권력은 최첨단 감청장치를 동원, 그를 뒤쫓는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도청장치나 감시카메라도 이미 미 국가안보국이 10여 년 전에 사용하던 낡은 기술이라 한다. 결국,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프라이버시란, 사전 속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이다.

 

국가안보국은 딘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그의 모든 정보를 캐내 변호사 사무실에서 해고시키고, 금융거래를 정지시키고, 불륜을 조작해낸다. 처음에는 마피아 보스의 짓으로 알았던 딘은 자신의 정보원인 브릴을 통해 모든 음모가 국가기관의 짓임을 깨닫는다. 이 영화는 국가안보국 부국장인 레이놀즈에서 시작된 사건의 주된 목적을 개인적 욕구로 머물게 했다. 한 개인이 거대 권력의 힘에 맞서 보여주는 주인공 딘과 그를 도와주고 대항하는 브릴은 전략을 짜고 맞선다. 현실과는 다르게 영화이기에 결말은 정의의 승리이다.

 

 

2. 과연 나의 적은 국가인가

 

 

[출처] http://416act.net/notice/30118

 

대한민국에서 실시간으로 뉴스가 되는 고 백남기 농민은 작년 11월 경찰이 쏜 물포에 맞아 쓰러져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317일 동안 생사를 넘나드는 투병 중에 세상을 버렸다. 국가는 과잉 진압으로 발생한 폭력에 사과도 책임도 지지 않는 상황이다. 국가에 의해 희생되는 개인이 바로 나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스스로가 국가 폭력에 저항하는 의식적인 노력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국가는 여전히 한 개인에게 적으로 대치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한 개인의 인권이 짓밟히고 있는 과정들을 되새기게 한다. 약자를 국가기관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목적에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국가’를 이용하고 있는 그들을 막을 힘은 시민의 연대이다. 정부는 국민의 요구에 따라 국가를 운영하는 위임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동안 보수언론들이 쏟아내는 관련 기사들은 국가기관을 옹호하기 위한 편파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 언론 매체들만을 접하는 많은 이들에게 개인 백남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주류 언론의 환경에 영향을 받고 있기에 개인들이 관심을 두고 지켜봐야 한다. 의식 있는 행동을 하며 사회를 바라볼 시선 유지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가를 묻는다면 불가능하지도 않다.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쾌적하게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는 개인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개인이 태어나서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동안 사회에서 얻지 않는 것이 없다. 말과 생각, 몸, 생명 등 내가 가진 거의 모든 것이 사회로부터 얻은 것이다.

 

생존 자체를 사회에 의존해서 해결하고 있다. 그런데도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이 사회와 나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아 발생하는 사회문제는 개인을 외면한다. 그래서 개인들은 이 사회가 돌아가는 일들에 민감하게 오감을 열어두어야 한다. 사회와 한동안 떨어져도 인간의 본질을 잃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사회를 배제한다면 동물적인 본성만이 강해져 사회와 조화로운 삶은 불가능해진다.

 

개인의 고유한 정신들은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사회 속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형성되고 발전해 간다. 사회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고, 충돌로 인해 일상은 이슈로 넘친다. 결국, 사회 없는 개인은 생각할 수 없다는 거다. 사회제도에 의해 내가 억압받는다면 그 제도에 관한 나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적극적인 자유를 표현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개인이 단순히 사회의 부속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특한 개성과 의미를 지닌 존재이기에 개인 없는 사회 또한 존재할 수 없다.

 

지인들이 그동안의 내 삶과는 다른 면면들에 우려 섞인 애정을 담아 너무 정치적이지 않냐고 말을 한다. 이런 변화에 나는 ‘나의 자유를 위해 민주주의 지키기가 필요한 투쟁’ 아니겠냐고 답을 했다. 내 나라에서 홀로 주체로서 살아가는 내가 서로 주체가 될 수 있는 공동체를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에 왜 의심을 할까. 그저 5년짜리 정부에 불과한 이들이 국가를 이용해 국민을 분란 조장시키는 일을 멈추게 하면 된다.

 

현재 내 나라는 괴물, 리바이어던이 되어 생명의 존엄성을 마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짓밟고 있다. 기본적인 생명 존엄조차 지켜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너무 로맨틱하다. 민주주의에 가하는 위협을 국가로부터 느껴야 한다는 것은 불편한 진실이다. 1987년 이후 이 땅에서 우린 무엇을 하였던가. 나는 로맨티스트이기에 내 나라의 민주주의 파수꾼이 될 수밖에 없다. 당신의 행복도 나의 삶만큼 중요하니까.

 

87항쟁이 이루어낸 민주주의의 가치는 정당성을 잃은 정부에 의해 실종되었다. 나의 냉랭한 시선이 주류 언론을 앞세워 선동하고 획책하는 데 날개를 달아 준 꼴이다. 개인으로 안주했던 시간을 사회에 투영하여 나를 겁먹게 하는 괴물이 된 국가에 잡아먹힐 수는 없다. 내가 정치에 참여하는 일은 국가를 감시하고 압박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정치는 책략이 아니다. 정치는 사회를 조화롭게 작동하도록 힘을 모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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