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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세상 나누기]

색깔 있는 사람

푸른비 이창우 (mediamall)
2018-09-04 11:3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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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 필립 페셀은 여성과 남성의 특성을 네 가지 성향으로 말했다. 여성은 어머니, 애인, 전사, 선생님이고, 남성은 농부, 유목민, 건설자, 전사로 나타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든 이 네 가지 성향이 다 있거나 그중 한 가지, 또는 복합적으로 있을 수 있다. 그중 어느 것이 더 발달하는 가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사회가 자기에게 부과한 역할에서 자기의 존재 의의를 찾지 못할 때 생긴다. 때로는 강요 때문에 격렬한 충돌이 생긴다. 자신의 특성을 다 발휘할 수 있는 삶을 살게 된다면 자신이 생각하는 완벽한 목표를 이루어내는 것은 아닐지. 그런 세상은 영화 속에서나 열릴 거야. 그렇다 해도 미리부터 포기할 일은 아니지만.

 

 1998년 게리 로스 감독의 영화 <플레전트빌>

 

 

1. 과연 보이는 것만큼 행복할까.

 

1998년 게리 로스 감독의 영화 <플레전트빌>의 중심엔 TV 프로그램 <플레전트빌>이란 시트콤이 있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인기 프로그램은 많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이제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른 저녁,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여보, 나 왔어!”라고 말하면, 앞치마를 두른 어머니가 부엌에서 나와 반갑게 맞는다. 정성이 가득한 음식들로 채워진 저녁 식탁에 가족들이 둘러앉아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풍경이 보인다.

 

그러나 이 시트콤을 시청하는 열혈 데이비드의 현실은 너무나 다르다. 이혼한 부모님은 헤어진 이후에도 전화로 서로 싸우고, 하나뿐인 쌍둥이 여동생과는 서로 관심도 없다. 집에 와도 차가운 냉동식품을 데워 홀로 끼니를 때운다.

 

데이비드가 ‘플레전트빌’ 시트콤에 빠지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시트콤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각 에피소드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하고 있어 어떤 퀴즈를 내도 그것에 관한 한 척척 맞춘다. 드라마 오덕인 거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쉽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괴짜에다 소심한 남자아이일 뿐이다.

 

반면에 여동생 제니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책이라곤 읽어본 적도 없지만, 학교에서 소위 ‘잘 나가는 소녀들’ 중 하나이다. 어쩌면 방탕하다고 할 만큼 연애도 거침없이 자유분방하다.

 

정작 영화나 텔레비전 안의 인생이 보이는 것처럼 행복할까? 아니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삶은 보이는 게 전부이다.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배우들이 연기를 하는, 그럴듯한 세트 안의 인생은 조명이 꺼지면 더는 그곳에 없다.

 

 

 

2. 드라마 오덕, TV 안으로.. 그곳은 바로!

 

나도 드라마 오덕일 때가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한 드라마는 DVD도 소장하고 며칠 낮과 밤 동안 그의 세상 속으로 여행을 가기도 한다. 또 내가 영화의 세게로 일탈도 한다. 그래, 우리는 왜, TV 속 드라마의 열혈 시청자가 되는 것일까? 이 영화의 주인공 데이비드처럼 현실에선 가능하지 않은 일상의 판타지를 경험하고 싶은 것일 이유가 가장 클 것 같다.

 

드라마나 영화는 영상으로 고정해 놓은 이미지로 있을 뿐이다. 보여주기 위해 만든 삶이기에 그것으로 끝이다. 그다음은 보는 이들의 감정에 남아있을 테지. 기쁨이거나 슬픔이거나 분노일 수도 때론 낭만적으로 로맨틱하게 내 안에서 작은 미소를 한 두 번 짓게 해 줄 수는 있다.

 

학수고대하던 학교 킹카와의 데이트가 있는 제니퍼와 시트콤을 봐야만 하는 데이비드의 금요일 저녁이다. 둘이 리모컨을 서로 가지려다 박살이 나고, 때맞춰 등장한 심히 수상쩍은 TV 수리공 할아버지가 시트콤 <플레전트빌>에 데이비드가 척척박사라는 걸 알고 신기한 리모컨을 건넨다. 둘은 리모컨 작동과 동시에 촌스러운 복장에 흑백의 몸으로 시트콤에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인 화목한 가정의 아들과 딸로 변해 그 안에 있다.

 

시트콤의 플레전트빌은 현실을 지배하는 모든 법칙들이 교묘하게 비껴가는 곳이다. ‘기쁨이 있는 동네’이기에 불도 날 수 없고, 비도 나리지 않고, 농구부 선수들이 넣은 슛은 무조건 들어간다. 소방관들은 출동하여 나무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고양이를 구조하는 것이 가장 큰 업무이다. 한마디로 실패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그렇다. 웃음과 교훈을 주는 시트콤은 언제나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곳의 사람들은 실제의 인간이 아닌, 허구로 꾸며진 반쪽짜리 존재들이니까. 이 이상적인 세상에서 잘 적응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방송에 대해 무엇이든 알고 있는 그들이야말로, 이 작은 도시에 걸맞은 등장인물인 것이다.

 

신기한 리모콘을 받는 데이빗

 

 

3. 너의 색깔은 어디?

 

플레전트빌에서 아이스크림집의 존슨은 데이비드가 오지 않으면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무의미하게 카운터 위나 닦으면서 데이비드가 올 때까지 멍하니 기다려야 한다. 그는 시트콤에 자주 등장하는 ‘카페 주인’의 역할이다. 언제나 카운터를 닦으면서 주인공에게 필요한 조언을 해주는, 선량한 캐릭터이다. 식당 문을 열고 카운터를 닦고 메인 주인공이 등장할 때마다 가끔 비치는 조연인 것이다. 그런 그에게 데이비드가 말한다.

 

존슨, 스스로 그 무엇도 할 수 있어요. 다음부턴 제가 오지 않아도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모든 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니까요. 마음대로 바꾸어도 되는 거죠.

 

그 후, 작은 자유를 맛본 존슨은 더 큰 자유에 대한 욕망이 생겨나고 이렇게 플레전트빌은 변화를 맞게 된다.

 

이 영화에서 ‘색깔’은 ‘인간다움’과 일맥상통한다. 아기처럼 아무것도 모르던 주민들이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깨닫게 되면서 색깔을 찾는다. 여전히 마을의 배경은 흑백이지만 생생한 색깔을 찾게 된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간다. 그러나 아직 자신의 색깔을 찾지 못한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들을 유색인종으로 취급하며 단호하게 뭉친다.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들 사이에서 시대의 현실 감각을 찾아내지 못한 괴성들이 겹쳐진다. 나도 어느새 시트콤 같은 나라에 있는 것인가 싶어져 섬뜩함을 만나기도 한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마치 영화 같은 일들로 기운을 빼게 한다는 사실. 어쩌면 우리도 영화 속의 세계로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끌려 들어온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우리의 21세기에 지난 세기의 유신 대통령 아바타가 현란하게 빛나던 시점은 철창으로 분절되었다. 그것으로 지나온 10년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 플레전트빌은 그동안 지켜온 언제나 유쾌한 마을을 지키기 위해 주로 시장을 중심으로 한 중년 이상의 남성들이 나선다. 시트콤에서 제니퍼의 아버지도 포함된다. 마치 우리들의 아버지들처럼 시대의 변화에 호들갑을 떨며 놀라고 어이없어하는 모습들이 연출된다.

 

그들이 어이없어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내들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거다. 저녁에 집에 들어왔을 때 당연히 맛있는 식사가 차려져 있어야 하는데, 색깔을 찾은 부인들이 그것을 거부한다. 도서관에는 책들이 글자를 채워 컬러로 빛을 내고 연인들의 호수에는 컬러의 세상이, 그들만의 자유로움이 자연스럽게 채색된다.

 

중년을 넘긴 그들은 플레전트빌의 기득권자이자 권력자, 그리고 지배자였다. 그들은 변화가 두렵다. 이미 지금도 충분히 힘과 관련된 편리함을 누리고 있기에. 그래서 그들은 젊은이들이 방종하게 연애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는 책들을 강제로 빼앗아 불태워 버리고, 자유롭게 음악을 듣지 못하게 금지곡을 만든다. 시장은 사람들을 선동하며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이곳 주민들이 지켜야 할 법규들을 새로 만든다.

 

플레전트빌을 지키고 싶은 이들과 자기 색을 찾아 변화하고 싶은 그들

 

 

4. 모두가 존중하는 그들만의 행동강령

 

하나. 파괴와 야만 행위는 즉각 중지한다. (흑백의 마을 청년들은 존슨의 가게를 파괴한다.)

둘. 주민 상호 간에 정중하게 대한다. (자신의 색깔을 찾아 존슨의 그림 모델이 된 데이비드의 엄마를 거리에서 희롱한다.)

셋. 연인의 호수와 도서관은 폐쇄한다.

넷. 다음과 같은 노래만 허용한다. 마티스, 페리 코모, 잭 존스, 존 필립수자, 애국가. 그리고 유쾌하지 않은 음악의 연주를 절대 금지한다.

다섯. 우산 같은 비와 관련된 제품 판매를 금한다. (이 마을에 비는 나리지 않았다. 언제나)

여섯. 폭 1.5미터 이상의 침대 판매를 금한다. ( 플레전트빌의 부부에게는 작은 싱글 침대 두 개가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아내들이 그것을 거부한다. 더블 사이즈로!)

일곱. 그림을 그릴 경우에는 흑, 백, 회색으로만 한정한다.( 존슨은 컬러로 그림을 그려 자신의 가게에 내걸었다.)

여덟. 각 학교는 변화보다는 지속성에 중점을 두고 역사의 불변성만을 교육한다.

 

급속도로 변화하는 사람들을 억누르는 기득권 층의 횡포와 발악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의 야만성과 자신의 색을 찾은 이들을 향해 ‘유색인종’이라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장면들도 역시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선택된 말이 다를 뿐 현재 이 사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그 모습을 20년이 지난 영화를 통해 되새김질하다 보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서글픔"에 모욕감마저 고개를 내민다. 하지만 영화에서도 자신의 색깔을 찾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든다. 아직 흑백인 마을 사람들에 의해 파괴된 존슨의 가게에 모여 투표로 결정된 이 강령을 읽고 저항을 시작한다. 아직 파괴되지 않은 뮤직박스에서 그들이 원하는 이미 금지된 자유로운 음악을 틀고, 데이비드와 존슨은 밤을 새워 저들만의 색깔로 빛을 내는 벽화를 그린다.

 

금지된 색깔로 벽화를 그린 후 법정에 선 존슨과 데이빗

 

 

5. 결정적인 해결책은 없지만 늘 새로운 시도는 가능하다!

 

우리들은 현실에서 얼마큼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걸까. 지금도 무언가에 도피하기 위해 텔레비전이나 재미난 영화에 빠져 세상을 잊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아닐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속의 활자 '인간'은 이렇게 배열되어 있다.

 

인간은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대할 때 가장 큰 두려움을 느낀다. 그 미지의 것이 적대적인 존재일지라도 일단 정체가 밝혀지면 인간은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반면에 상대의 정체를 알지 못하면, 상상을 통해 두려움을 부풀리는 과정이 촉발된다. 그리하여 각자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던 악마, 가장 위험한 존재가 나타난다...... 그러나 아직 이름이 붙어 있지 않은 미지의 존재는 무엇이든 인류를 위한 새로운 도전을 유발할 수 있다.

 

이 영화 속의 시트콤, 플레전트빌에서 사람들이 자각과 경이를 느끼면서 그동안 내릴 수 없었던 비가 내린다. 그 비를 보고 무서움에 떠는 그들의 표정은 우리 사회에서 한 개인이 나쁜 정부를 향해 저항할 때 만나는 두려움과도 비슷할 것 같다.

 

무엇이든 하지 않는다면 안 되는데 정작 실행하면 나만 다칠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끼게 해 주는 이 사회도 제 색깔을 찾으려는 개인들이 많아지면 변화가 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나는 잘못된 일들을 파렴치하게 휘두르는 권력 남용에 저항을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보다는 하고 나서 만날 내일이 덜 두렵다. 

 

나는 색깔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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