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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마산장(1) - 귀농지를 찾다가...

촌사람 (jsandsj2003@hanmail.net)
2018-01-28 11:4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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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빵 이야기만 할 순 없다. 징역이라 봐야 내 살아온 날의 1할 남짓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전부 팩트다.
 

해서 부득이 지명과 인명을 바꿔서 쓸 수밖에 없다. 이 이야기에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생존해 있기 때문이다.

 

2003년 가을 경이었다. 감옥에서 나온 지 반년쯤 지난 그 시기에 나는 귀농지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도발이 생활 중에 머물며 농사일을 배웠던 남녘의 해남으로부터 시작한 여정은 강진, 영덕, 영해, 청양, 봉화, 영주, 괴산, 문경, 홍천, 횡성, 화천, 양구 등지로 이어졌다. 벌어놓은 돈이 없어 땅값이 싼 동네를 찾아다니다 보니 발 닿는 곳 모두 오지 중에 오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영산군에 살고 있던 한 후배로부터 싼 땅이 있으니 가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녀석은 타고난 한량이라 명문대를 졸업하고도 아주 잠시 직장생활을 했을 뿐 이내 영산으로 낙향해 매형이 운영하는 빵공장에 얹혀살고 있었다. 빵공장에 몇 번 가보았지만 그곳에서 녀석의 지위와 역할이 무엇인지는 늘 오리무중이었다. 가끔 배달도 하지만 주로 하는 일은 외국인 노동자들과 어울려 그들의 애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전부인 듯이 보였다. 녀석이 내게 땅을 소개한다는 것은 사실 크게 신뢰할 일이 아니었다. 핑계를 하나 만들어 여주로 귀농한 녀석의 절친과 나를 불러 놀고 싶다는 의사 표현일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나는 여주에 들러 성은 허요 이름은 당이라는 녀석의 친구를 불러내 차를 몰고 영산으로 내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소개한다던 땅은 값이 싸긴 한 데 쓸 수가 없었다. 맹지라 집을 지을 수도 없었고 동네 노인정 노인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주변이 석회암지형이라 식수로 쓸 지하수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소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보를 들을 요량으로 노인정에 사간 막걸리를 기울이며 노인네들과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영산군에 귀마곡이라는 계곡이 있는데 그곳이야말로 물 맑고 풍광 좋기로 조선팔도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60년대 화전정리 이후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아 지가도 평당 만원을 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이미 해가 중천에서 기울고 있었지만 귀가 솔깃해진 우리는 바로 일어나 귀마곡을 찾아 나섰다.

 

귀마곡에 도착한 우리는 초입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영산군이 귀마곡을 관광지로 개발하기위해 도로포장을 하고 있어 출입을 금지한다는 푯말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빵공장 녀석은 돌아가서 술이나 먹자고 했고 허당이라는 녀석은 계곡은 걸어서 탐방하는 것이 제 맛이라고 우겼다. 설왕설래 끝에 우리는 해 떨어지기 전에 돌아 나올 수 있는 만큼만 들어가 보기로 정하고 레미콘을 부어 놓은 길 가장자리를 밟으며 계곡으로 진입했다. 계곡 초입부분은 레미콘이 굳지 않았지만 안 쪽 100여 미터 지점부터는 레미콘이 잘 굳어 있어 걷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위로 오를수록 계곡은 참으로 수려했다. 풍부한 수량의 옥빛 물살을 타고 고기들이 노니는 모습이 선명히 보였고 지형이 커다란 암반으로 이루어진 터라 곳곳에 작은 폭포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시퍼런 소가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당초 깊이 들어갈 생각이 없이 시작한 노정이었지만 우리들 중 누구도 그만 돌아 나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별유천지 비인간, 인적이 끊긴 곳에 펼쳐진 선경이 우리를 더 깊숙한 곳으로 이끌고 있던 것이다.

 

비경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오르다보니 어느새 계곡 최상류에 이르렀다. 상류라 계곡의 폭은 줄었지만 수량은 여전해 곳곳이 선계를 방불했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는데 갑자기 밥 짓는 냄새가 진동하더니 자그마한 산막 한 채가 나타났다. 곧 무너질 듯한 누옥이었지만 집 앞 계곡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커다란 자연석 위로 옥수가 넘쳐흐르는데 수심이 능히 세길은 되어 보였다. 우리 일행이 선녀탕에 넋을 빼앗긴 사이 누군가 뒤에서 헛기침을 했다. 누옥에 사는 노인은 친절하게 우리를 집안으로 들였다. 안주인 노파는 몸 져 누어있다 일어나 우릴 반겼다. 아마도 사람 구경한지 꽤나 오래된 모양이었다. 노인은 대접할게 별로 없다며 감자와 직접 담았다는 술을 내왔다. 가뜩이나 출출했던 우리는 순식간에 술 두되를 해치웠다. 그런데 그렇게 마신 술이 장난이 아니었다. 이른바 벌렁주였던 거다. 누룩으로 빚은 술을 서늘한 곳에 잘 보관하면 도수가 30도까지 올라간다. 초산발효 직전의 이술은 달콤하고 향기로워 술술 넘어간다. 그렇게 맛과 향기에 취해 마시다가는 정신 줄을 놓고 벌렁 자빠진다 해서 벌렁주다. 하지만 화학감미료가 전혀 없는 술이라 금방 깨기도 하고 뒤끝이 없다는 게 장점이다.

 

예상대로 노인부부는 사람구경을 거의 못하고 살고 있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지나가던 약초꾼을 볼까말까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젊은 사람들이 어인 일로 이 깊은 산중까지 오게 됐느냐고 물었다. 우리 행색이 등산객도 아니고 약초꾼도 아니었으니 궁금했을 거다. 농사 질 땅을 찾는다는 말에 노인은 손사래를 쳤다. 이 계곡에는 젊은 사람들이 부쳐 먹을 만큼의 농지가 없다는 거였다. 올라오다보니 제법 널찍한 묵정밭이 있던데 혹시 주인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바로 그 묵은 밭 위에 땅주인이 살고 있다고 했다. 집을 못 보았다고 했더니 묵정밭 위, 그러니까 계곡 서쪽 둔덕으로 오르면 집이 한 채 있고 그곳에 젊은 여자가 혼자 사는데 농사를 짓지 못 해 밭을 묵히고 있으니 가서 한 번 알아보라고 했다. 그 깊은 산중에 젊은 여자가 혼자 산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지만 노인이 그렇다니 얼른 가보고 싶어져 이미 마신 술값에 더해 술 두 병 값을 치르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동안 땅 보러 다닌 경험에 따르면 경치를 보고 귀농한 젊은 사람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땅을 처분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작별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우리들 뒤꼭지에 대고 노인이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그 여자 조심혀, 신기가 있다나봐”

 

(계속)

 1980~90년대에 민주화운동 관련으로 여러 차례 투옥되었고 지금은 강원도 화천 오음리에서 농사 짓고 글 쓰고 생들기름 만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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