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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나가야한다

(mediamall)
2018-02-21 17: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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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안기부 별관 지하로 통하는 계단과 유치장 흔적

 

아버지는 연행된 첫 날을 진도경찰서 유치장에서 보냈다.

다음날 오전 6시에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왔고, 아버지는 그들의 팔짱을 낀 채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은수정(수갑)은 채우지 않았다. 수사관들은 남산터널을 지나면서부터는 아버지의 눈을 가리고 엎드리게 했다.

 

오후 5시쯤에 중앙정보부 남산 지하실에 도착했다. 8월 하순이었지만 남산 지하실은 오싹한 한기가 느껴졌다.

 

아버지는 열 평정도 되어 보이는 지하실 방에 도착했다. 그 방은 이상했다. 바닥은 딱딱하게 보였지만 푹신했고, 방음시설이 돼있었다. 그들은 아버지를 카키색 군복으로 갈아입혔다. 그리고 조사가 시작되었다. 이름, 생년월일, 주소……

 

8시쯤에 조사계장이라는 자가 그 방으로 들어왔다. 조사계장은 술 냄새를 풍기면서 말했다. ‘이곳의 첫 인사는 물 먹이는 것이다’ 그 말이 떨어지자, 아버지의 두 손에 은수정(수갑)이 채워지고 두 손과 두 발이 포승줄에 묶였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1미터 정도가 되는 각목을 책상과 책상 사이에 걸치고는, 아버지를 거기에 매달았다. 바비큐 파티를 할 때처럼 대롱대롱 매달린 아버지의 얼굴 위로 물이 쏟아졌다. 그들은 물이 가득 든 주전자를 서로 돌려가며 아버지 얼굴에 붓기 시작했다.

 

고문관은 모두 6명이었다. 2명이 한 조가 되어 3개조로 나눈 다음, 8시간씩 근무했다. 그들은 8시간씩 근무하면서 아버지를 24시간 고문했다.

 

그들은 아버지를 팬티차림으로 반듯하게 방바닥에 눕혔다. 그런 다음 아버지의 두 손과 두 발을 구둣발로 밟고 올라섰다. 그 상태에서 아버지의 얼굴에 물을 붓는 것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물은 가속이 붙었다. 그런 식의 물고문은 매일 이어졌다.

 

그들에게는 고문의 매뉴얼이 있는 것 같았다. 300와트나 되는 높은 촉수의 전등을 아버지의 눈앞에 들이댔다. 300와트의 고촉 전등이 눈앞에 쏟아지면 눈이 저절로 감긴다. 신체의 자기방어기제가 작동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면 어김없이 몽둥이가 날아왔다.

 

밤에는 조사계장이라는 자가 들어와 고문의 수위를 높여갔다. 그는 쥐색양복을 입고 출근을 했는데, 매 번 고문을 시작 할 때면 가벼운 옷차림으로 갈아입었다.

 

조사계장은 아버지의 두 손을 앞으로 나란히 올려 서있게 했다. 아버지가 눈동자를 움직이거나 한발자국이라도 옮기면 온 몸에 몽둥이를 휘둘렀다. 주로 어깨와 팔을 두들겨 패는데, 상처가 나지 않도록 신경 쓰는 듯 했다. 마치 상품에 흠집이 생겨 제값을 못 받을까봐 전전긍긍하는 노예상인 같았다.

 

매일 아버지의 땀과 체액이 흥건히 바닥을 적셨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갈 즈음이면 또다시 300와트의 전구 앞에 앉아야 했다. 눈이 멀 지경이었다. 시력뿐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몸과 정신도 함께 멀고 마비되어 갔다.

 

수사관들의 교대시간은 일정했다. 그리고 고문방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50센티 정도의 사각 몽둥이를 아버지 정강이 사이에 끼워 놓고는 3, 4시간씩 무릎을 꿇렸다.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토록 치욕스럽게 무릎을 꿇어야 했을까? 왜, 도대체 무엇 때문에, 무슨 잘못을 했다고……

 

아버지는 매일 24시간을 통닭처럼 묶인 채로 물고문을 당했다. 누운 채로 당했고, 손들고 앞으로나란히를 한 채로 당했다. 300와트의 고촉 앞에 앉아 ‘눈뜨고 밤새우기’는 매일 밤 계속되었다.

 

그들이 요구하는 진술 내용에서 한 글자라도 틀리면 여지없이 고문이 이어졌다. 물고문과 몽둥이찜질에 이어서 300와트의 전구 앞에서 잠 안 재우기, 각목 끼고 무릎 꿇어앉히기 등의 고문이 차례로 가해졌다.

 

아버지가 혼미한 정신으로 늘어지면, 볼펜심지 2개를 성기에 쑤셔 넣었다.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래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고문관(수사관)들이 원하는 건 아버지의 진술서였다. 그들에게는 한 인간의 억울함이나 고통, 인간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간첩이라고 자백하는 진술서만이 그들이 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명의 간첩이라도 더 만들어내는 게 수사관들의 최종 목표였던 것이다. 왜? 승진을 하고 포상을 받기 위해서! 단지, 그런 이유로.

 

매일 오전 10시에는 의사와 간호사가 들어와 혈압을 확인했다. 아버지는 요도 부위의 통증을 호소했다. 그러나 조사계장은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직도 멀었다는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30알 정도의 약을 건네면서 매일 먹으라고 말했다.

 

조사계장은 ‘박양민을 만났다고 시인만 하면, 내일이라도 내보내 주겠다’고 회유했다. 아버지는 사실대로 말했다. ‘만난 일이 없는데, 만났다고 합니까?’ 그러자, 고문이 한 가지 더 늘어났다. 담뱃불로 무릎 밑에서 발목까지를 지져댔다. 그 짓을 하루에 2~30회를 하면서 일주일이 넘도록 했다.

 

어느 날 부산 사투리를 하는 수사관이 들어와서 말했다. ‘친척을 만났다고 하면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가 적용되는데, 간단하게 만났다고만 자백하면 그것으로 조사를 종결하여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주겠다’고.

 

또 어느 날은 광주가 고향이라는 고문기술자가 들어와서 ‘같은 전라도 사람이니, 안심하고 자백만 하면, 곧 위대하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니 나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8월 27일에는 4~5명의 고문기술자들이 찾아왔다. ‘이곳에 들어오면 그냥 나가는 사람이 없다’고 위협 하면서 ‘어떤 사람이든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등 ‘다 알고 있으니 빨리 자백하라’고 다그쳤다.

 

어느 날 아버지는 전기 고문실로 방을 옮겼다. 그날 아버지 머릿속에 떠오른 건 한 문장이었다. 이제는 죽는구나!

 

전기고문실에서 악랄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송곳 끝을 5밀리 정도만 보이도록 손으로 쥔 채 그 송곳으로 아버지의 하반신을 찌르기 시작했다. 입고 있던 카키색 군복위로 피가 배어 나왔다. 전기고문실로 방을 옮겼지만 전에 하던 고문이 멈춘 것이 아니었다. 그때 받았던 고문들도 고스란히 아버지를 따라왔다. 아버지는 붉은 피로 범벅이 되었고, 그 핏속에서 폐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조사과장이라는 자가 다시 들어왔다. ‘왜 이리 보기 안 좋게 조사를 하느냐’며 아버지의 군복을 새것으로 갈아입히게 했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박양민을 한 번 만났다고 하면 내보내 주겠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만나지도 않은 사람을, 만났다고 어떻게 거짓말을 하느냐’고 말했다. 이번에는 과장이라는 자가 말했다. ‘안 되겠다. 다시 시작해라.’ 그렇게 말한 뒤 나가버렸다. 다시 아버지의 양손에 수갑이 채워지고, 얼굴에는 넓은 수건이 덮였다.

 

맨얼굴에 물을 부울 때와 수건을 얼굴에 덮고 부울 때는 차이가 있다. 수건이 덮인 채 물세례를 받으면 순식간에 죽음의 냄새를 맡게 된다. 아버지는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다시 깨어나 보면 혈관에 주사바늘이 꽂혀 있었다. 며칠 동안 그런 고문이 반복되었다.

 

매일 계속되는 송곳과 담뱃불로 상처 부위가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매일 같은 의사와 간호사의 진단은, ‘혈압 이상무’였다. 상처를 확인한 의사는 계장이라는 자에게 귓속말로 몇 마디 중얼거리더니 사라졌다.

 

잠시 후 계장이 들어오더니 아버지를 보며 비웃었다. 그의 손에는 쇠고기가 들려 있었다. 그는 고기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너희 집에서는 이런 쇠고기를 먹어 본적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종잇장 같이 얇게 자른 쇠고기를 꺼내 아버지의 상처에 붙였다. 핏자국으로 얼룩진 아버지의 하반신에 2~3mm정도의 얇고 널찍한 쇠고기를 모두 붙이고는 그 위에 붕대를 감아놓았다. 그 모양이 마치 미라 같았다. 살아 있는, 아니 죽어가는 미라……

 

쇠고기로 상처부위를 치료하는 동안에는 고문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진술서는 매일 써야했다.

 

고문실에는 아버지의 하반신에 감아놓은 쇠고기 냄새가 진동했다. 고문실의 기온이 내려가고 한기가 느껴졌다. 그래서 아버지는 8월이 하순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옆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의 고문도 다시 시작되었다. 고문기술자들은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보자는 듯 더욱 전투적이었다.

 

그들은 아버지의 두 손에 수정을 채워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발이 조금만 움직여도 거꾸로 매달았다.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했다. 밤과 밤의 구분 없이 고문은 계속되었다.

 

고문기술자들은 늘 아버지를 철창 높은 곳에 거꾸로 매달아놓고 잠을 청했다.

 

9월초부터 전기 고문이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손으로 돌려서 전기 고문을 했지만, 그때는 전선만 연결하면 되었다. 인류를 복되게 한 전기를 그들은 죄를 생산하기 위해 사용했다. 전선만 연결하면 아버지는 간단하고도 무자비하게 혼절했다.

 

‘여기서 살아서 나가야한다.’

 

아버지가 무너진 것은 전기고문이 시작되면서 부터였다.

 

‘딱 한번 군산시에서 박양민을 만났습니다.’ 고문관들은 이미 간첩을 만드는 데 쓰이는 대본이 있었고, 그 대본에 맞추어 쪽 대본을 추가하곤 했다. 아버지는 결국 1년에 한번씩 7차례 만났다고 진술했고, 그대로 공소장이 써졌다.

 

조사계장 스스로도 공소장을 보며 웃었다. ‘간첩이 어떻게, 그 삼엄한 경비구역을 일 년에 한 번씩 이웃집 드나들 듯 했을까?’하면서 웃었다.

 

‘살아서 나가는 것만이, 나의 무죄를 증거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아버지의 진술서 작성은, 계속되는 고문에서 살아남으려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9월 28일경 구속영장이 청구되었고, 하루 새에 구속영장이 떨어졌다.

 

중앙정보부 검찰조서실로 파견 나온 검사는, 진술서를 6하 원칙에 의해 다시 작성하라고 했다. 아버지는 수사관들과 함께 고문실로 돌아왔다. 진술서를 6하 원칙에 맞게 다시 작성했다. 다시 진술서를 작성한 후에는 서약서가 추가되었다.

 

‘중앙정보부에서 진술한 모든 사실이 진실이며, 만일 고문 사실을 검찰청에서나 사회에 나가서 이야기하면 이곳에 다시 소환 할 것이고, 그때는 귀신도 모르게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진단서 한 장이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하면서 서약서를 강요했다. 아버지가 연행되어 구금이 되고, 고문을 받은 지 47일만이었다.

 

서울구치소 2사 상17방

 

아버지는 10월 6일,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10월 7일 서울구치소 조사실에는, 검사와 검사서기, 타자를 치는 여직원이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사실을 말했다. ‘정보부에서 자필 진술을 쓴 것은, 너무나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여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그들의 강요에 못 이겨 허위로 썼다’고.

 

그 순간 검사의 눈초리는 뱀의 비늘처럼 차갑고 묘하게 변했다. 그 검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조사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 사람 다시 정보부로 보내라’ 그리고 아버지의 진술서를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나가버렸다.

 

그 검사의 목소리도 고문기술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순간 아버지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살아서 이곳을 나가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다시 중앙정보부에 가게 되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걸 직감했던 것이다. 미치게 억울하고, 죽도록 서운했다.

 

옆에 서있던 교도관이 다가와 정보부에서 쓴 진술서를 그대로 써서 주면 되지 않겠냐고 말했다. 독방으로 돌아온 아버지에게 교도관은 종이와 볼펜을 전달하면서 말했다. ‘정보부에서 작성했던 그대로 써야지, 만일 다르게 써서 또다시 정보부 고문실로 가는 날에는 죽어서 나온다.’고.

 

아버지는 검사 취조차 검찰에 나갔다.

 

서울지검 제3차장 변진우 검사는 아버지의 진술서를 보고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91년 6월 6일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석권호 : 1980년 전두환 정권이 고문으로 조작한 소위 '진도간첩단사건'으로 18년 동안 투옥되셨던 저희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입니다.

[청와대 청원] "군사독재 시절 자행된 간첩 고문 조작사건들의 가해자들을 처벌해주십시오."

[그것이 알고 싶다 1109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사라진 고문 가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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