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검색

어머니, 그 먹먹한 이름

(mediamall)
2018-03-16 09:22:49
7    

어머니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있었던 것을 전달해야 한다는것. 썼다 지웠다를 몇번 반복했습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보다 옥바라지를 해야했던 사람들이 힘들었던 시절이 아니었나 생각도 해봅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 나이에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울다... 웃다...합니다. 지금은 두 분 다 치매로 결코 웃을 수만은 없지만...


 

아버지가 재심에서 받은 무죄의 이유는 ‘국가보안법 위반’과 ‘(구)반공법 위반’여부가 아니었다. 검찰 측에서 상고를 포기하기까지의 재심 내용은 공권력이 아버지에게 가한 ‘불법연행’과 ‘불법구금 및 가혹행위’였다. 국가의 권력이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사건에 대한 판결이었다.

 

아버지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끌려가고 난 후부터 어머니는 잠을 잘 수 없었던 모양이다. 어쩌다 한 시간여 동안 홀연히 잠에 빠질 때면 무서운 가위에 눌리곤 했다. 무엇엔가 쫓기는 모양인지 몇 번에 걸친 긴 울음소리를 토해내곤 했다. 어린 나는 그 흐느낌이 말할 수 없이 두려웠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어머니가 무의식 상태에서 그토록 겁에 질린 비명을 내놓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공포였다. 내 두려움에도 어쩔 수 없이 어머니는 당신이 겪은 기억의 감옥에 갇힌 채 오랜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는 아버지 사건의 재심이 무죄로 결론 나고부터는 점차 마음이 풀리기 시작한 모양이다. 잠시라도 남편이 곁에 없으면 찾아 나선다. 이제라도 남편이 옆에서 지켜주고 있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어머니는 그 안도감을 끌어안은 대신 자신의 기억을 조금씩 놓아버리기 시작했다. 손자들의 이름을 차차 지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어머니의 머릿속에 남은 건 그 옛날 유년시절의 추억이다. 유년의 그리움과 남편이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움켜쥔 채 다른 것들은 조금씩 잊어도 좋다고 여기는 듯하다.

 

어머니는 몰락한 가문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세 살 때 외할아버지가 소천 하셨고, 기울대로 기운 집안에서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무학으로 성장했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언제나 커다랗고, 그에 못지않게 괄괄한 성정을 지녔다. 그러한 특징은 아마도 시대와 가난한 유년기를 살아내면서 어쩔 수 없이 체득한 것이리라 짐작된다. 성정이 운명이라고 했던가. 결혼 후에도 어머니는 괄괄한 성격과 큰 목소리를 밑천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권위적인 시아버지와 보기 드물게 깐깐하기 짝이 없는 시어머니, 그리고 살갑지 못한 남편과 더불어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시어머니에 대한 어머니의 기억은 ‘한 시도 쉬지 않고 일을 시키면서 지적을 일삼는 대단한 존재’였다고 한다. 그렇게 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집안 분위기도 문제였지만, 어쩌다 먹는 눈칫밥마저도 늘 배가 고팠다.

 

보릿고개에는 하루 한 끼로 겨우겨우 때울 때가 많았다. 남편이라는 사람은 오지랖만 넓었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 한 평 가진 게 없었다. 그런 가난한 남편과 결혼해서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것은 행상뿐이었다.

 

진도에서 동남쪽을 바라보는 바다는 지금도 청정해역이지만 그때 당시에는 바닥이 보일정도로 깨끗했다. 노를 저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면 금모래가 반짝이는 바닥이 보일 정도였다. 진도는 다양한 어종의 생선이 많이 나는 섬이다.

 

어머니는 생선 행상을 시작했다. 면소재지 등 서너 군데에 5일장이 서는 곳이면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어릴 적에 나는 몇 번인가 어머니의 생선 행상 길을 따라 나섰다. 어머니는 장에 도착하면 순식간에 자리를 잡고 나서는, 내게 사과 서너 개를 사주시고는 자리에 앉았다.

 

본격적으로 장 구경을 나온 사람들이 불어나면 어머니의 좌판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 신기한 풍경이었다. 옆에서 장사하시는 분들은 아직 마수걸이도 못했는데 말이다. 아마도 어머니의 타고난 밑천인 큰 목소리와 성격이 한몫을 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함지박에 담긴 생선은 버스에서 내리기도 전에 사려는 손님들의 손에 이미 들려있기도 했으니까.

 

어머니는 행상인들 중에서 가장 빨리 비싸게 팔았고, 다른 행상인들의 물건까지 같이 팔아주고서 집으로 돌아올 정도였다. 생선 행상인들 사이에서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행상계의 무형문화재였다. 단순히 웃어넘기기에는 뼈아픈 훈장인 셈이다.

 

어머니는 그렇게 비린 냄새나는 행상을 30년 남짓하다가 1991년 진도를 떠나 서울로 갔다. ‘절대로 서울에는 올라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더니, 고향의 집과 터를 팔고 서울로 올라가서는 ‘절대 진도는 내려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어머니는 고향인 진도에서의 곱지 않은 시선을 등지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간첩의 아내에게 보내는 고향 사람들의 아픈 시선 대신에 타지에서의 외로움을 선택했을 것이다.

 

서울에서의 어머니는 보리, 콩, 도라지 등 곡물행상으로 전향했다. 전향, 전향이라…… 아이러니하게도 수감된 아버지가 공권력으로부터 ‘전향’을 강요당하던 시기에 어머니는 지역특색 때문에 간단하게 전향을 했다.

 

나는 지금도 길을 지나다 행상인들을 보면 발걸음이 멈춘다. 시장을 들어설 때나 버스를 기다리다가, 혹은 전철 입구를 들어설 때도 내 어머니는 아직도 그곳에 있다. 채소를 가리키거나, 곡물은 덜고 있거나, 혹은 생선을 들어 올리는 모든 여인네들에게서 내 어머니가 보인다.

 

어머니, 그 세 음절이 주는 울림이 새록새록 내 안에서 엄청난 부피로 자라나고 있다. 그런데 어머니는 당신이 팔았던 수많은 곡물과 생선들의 이름마저도 잊어버려 쩔쩔매곤 한다.

 

어머니, 당신이 팔았던 물건들 이름은 잊으셔도 좋아요. 당신이 갇혔던 기억 속의 감옥도 이제는 잊으세요. 그런 과거는 부수어 버리세요. 어느 날 당신이 내 어머니라는 것마저 잊는 날이 오면 ‘어머니’ 그 세 음절은 내 가슴에 있으니 염려 놓으세요. 당신은 절대로 잊히지 않을 거니까요. 어머니, 그 먹먹한 이름…… (계속)

 


석권호 : 1980년 전두환 정권이 고문으로 조작한 소위 '진도간첩단사건'으로 18년 동안 투옥되셨던 저희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입니다.

[청와대 청원] "군사독재 시절 자행된 간첩 고문 조작사건들의 가해자들을 처벌해주십시오."

[그것이 알고 싶다 1109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사라진 고문 가해자들

댓글[0]

열기 닫기

게시글 검색
1 2
이미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