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검색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mediamall)
2018-04-05 09:25:25
5    

 

88년 추석 무렵이었다.

“한 번 찾아가 보렴.”

어느 날 큰형님이 전단지 한 장을 내게 건네면서 말했다. 우연히 서울 길을 지나다가 받은 전단지라고 했다.

‘내 아들 김성만을 살려 주세요’

그 해 12월, 나는 그 전단지를 들고 동대문의 창신동에 위치한 ‘민가협’을 찾아갔다.

민가협 어머니들은 앞뒤 없이 뱉어내는 내 이야기를 말없이 들어주었다.

“내 아들 성만이도 지금 사형수로 감옥에 있단다.”

나 혼자가 아니었구나!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조작되어 사형수로 구금되어 있는 김성만씨의 어머니가 내 손을 꼭 잡고 울먹였다.

“잘 왔다…… 같이 힘을 모아보자.”

나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해 12월 28일 정치범에 대한 대대적인 사면이 이루어졌다. 두 건의 무기를 선고 받고서 복역하던 임동규 선생도 석방이 될 정도로 ‘정치의 봄’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도 나는 추웠다. 어린 시절부터 계절에 상관없이 늘 추웠다.

아무리 정치의 봄이라고는 하지만 간첩으로 낙인찍힌 460여명의 국가보안 범들은 차가운 교도소에 갇혀 있었다. 그 억울한 장기수들이 수감되어 있는 대전교도소, 광주교도소, 대구교도소, 안동교도소, 전주교도소는 여전히 추운 봄이었다.

 

이듬해 89년 1월 4일, 나는 민가협 사무실로 이삿짐을 옮겼다. 서울에 거처가 없던 나는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당시는 학생운동이 매우 활발한 시기였다. 공권력에 막혀 있는 상황에서도 가족들을 대신한 민가협 어머니들이 출동하면 뚫어내지 못한 집회가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는 교도소에 갇힌 가족과 새벽 2시에도 집단 공동접견을 하기도 했다.

 

그즈음 나에게 맡겨진 일 중에 하나는 장기수가 수감되어 있는 5개 교도소를 돌며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것을 혼자서 정리한 것은 아니었다. 최초의 비전향 장기수로 석방된 서준식 선생과 장기수였던 양승선 선생의 아들 양재모씨도 함께 했다.

재일교포사건, 구미유학생사건, 남파간첩사건, 어부월북사건 등을 유형별로 나누고, 사건이 일어난 시기별로 나누어 하나의 표로 만들고 사건마다 개요를 정리해 나갔다. 그렇게 5개 교도소에 구금된 460여 명의 장기수를 모두 정리했다

 

그 때 알게 된 몇 가지 사실이 있다. 정치적 선거 시기를 전후로 해서 공안간첩사건이 수직으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것과, 북한은 72년 7.4 남북공동성명 이후에는 남파간첩을 내려 보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90년 4월경에 어머니로부터 나의 군소집영장이 나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신체검사를 하고 현역입영 판정을 받아들었다. 그렇게 고향집으로 향하는 내 심정은 참담했다. 억울하고 초조했다. 군에 입대하면 아버지의 옥바라지와 면회는 누가 대신할까……

현역입영통지서를 받아든 내 얼굴을 보던 어머니는 표정이 없었다.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머니는 그때 내 앞에서는 참았던 눈물을 폭포처럼 흘렸다고 했다.

 

나는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급하게라도 아버지 후원회를 만들기로 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서 그 과정은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후원회 계좌도 만들었다. 그 계좌의 비밀번호는 아버지가 연행된 날짜인 8월 21일 이었다.

그 세월이 다 지난 이후 아버지의 재심과정에서 우리 사건을 담당한 변호사는 통장 비밀번호를 증명하는 서류를 은행에서 떼 오라고 했다. 그리고 그때 만들었던 통장 비밀번호는 아버지의 연행 날짜를 증명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돼 주기도 했다.

 

그 해 10월 나는 철원의 최전방 부대에 배치되었다. 이해가 안 되었다. 국가보안법 위반인 간첩죄로 옥살이 하는 간첩의 자식을 뛰면 10분도 안 걸리는 북한 땅 앞으로 배치를 하다니! 그 최전방 철책 앞으로 보내는 정권이 있다니 말이다. 그러니 나는 위험인물이 아니었고, 따라서 간첩의 자식은 더더욱 아니었던 것이다!

30개월이 지나 93년 제대 할 때까지도 나는 군 부적응 자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니 살아온 매 순간이 그러했지만 내겐 유독 고마운 손들이 많았다.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해볼 요량으로 찾아간 민가협에서 차가운 내 손을 꼭 잡아준 어머니들의 손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을까.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세월이다.

 

정권이 바뀌고 과거사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그때 진도 고향과 전주교도소에 근무했던 교도관을 찾아다니던 과거사청산위원회 수사관님과 조사관님도 고마웠다.

우리 사건뿐만 아니라, 고문으로 조작된 억울한 사건을 변호하겠다고 재심을 이끌어낸 변호사님들과 진실의 힘 식구들께도 고마웠다.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그 암울한 세월 속에서 죽음과 구속과 수배를 마다하지 않고 민주화를 위해 밑돌이 되어주신 분들께 한없이 감사하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기꺼이 거름이 되어주신 이름 없는 그 영웅들이 있었기에 현재의 내가 있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않는다. 아니, 잊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흘린 피와 땀과, 그들이 일찌감치 내려놓은 개인의 행복, 우리는 그런 것들을 딛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석권호 : 1980년 전두환 정권이 고문으로 조작한 소위 '진도간첩단사건'으로 18년 동안 투옥되셨던 저희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입니다.

[청와대 청원] "군사독재 시절 자행된 간첩 고문 조작사건들의 가해자들을 처벌해주십시오."

[그것이 알고 싶다 1109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사라진 고문 가해자들

댓글[0]

열기 닫기

게시글 검색
1 2

콩가루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