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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에 관한 나의 입장

박성호
2018-02-02 17: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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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브런치>에 썼던 글입니다.

 

 

아마도 페미니즘에 관해 내 자신의 솔직한 입장을 표명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실제로 이승평론이고 뭐고 사회에 대한 발언을 하는 일을 지속하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말이다. 물론 더 하게 되면 좋지만..

 

김진숙 씨는 유명한 노동운동가이며 김진숙 지도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고, 일반인들에게는 한진중공업 사태와 맞물려 고공 농성을 하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고 희망버스와 관련이 있는 여성 노동운동가라고 인식될 것이다. 이때 배우 김여진 씨도 한 목소리를 냈었던 것도 기억이 난다.

그 김진숙 지도께서 요즘 트위터에 올리는 글에는 여성문제를 타깃으로 하는 문제제기의 비율이 부쩍 늘고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이런 현상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본다. 근래 들어 우리 사회에 페미니즘적 주장이 매우 활발해지면서 사회적 명망이 있는 분들이 페미니즘에 관한 입장을 얘기하고 각종 시사 현안에 대해 의견을 발표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이 또한 굉장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을 한다. 오히려 2017년이 되도록 그런 일이 안 생겼던 우리 사회의 낙후성이 더 절망적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대부분의 남성과 또 상당수의 여성들이 이런 급작스러운 페미니즘적 문제제기라는 사회적 현상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뭐든 변하는 것은 불편한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불편하다는 것이 그 변화가 틀렸다는 증거는 절대 되지 않는다는 점은 기억해 두기로 하자.

 

그 결과 편이 갈려서 한쪽에서는 한남충이 어떻고 코르셋이 어떻고를 외치고 있으면 반대편에서는 메갈이 어떻고 쿵쾅이(크흑.. 이 표현의 저열함이라니.. ) 어떻고 하면서 서로를 비하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이 또한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사회적인 변화는 그 어떤 종류의 변화일지라도 이런 잡음이 발생하면서 그 사안이 사회 전반에 전파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안 그런 경우가 있을까? 없다.

 

그러나 그 잡음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낀다. 그러면서 또 한 번 편 가르기 현상이 벌어진다.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다. 뭐라고 한 마디만 하면 너는 어느 편이구나 하면서 속단이 벌어지고, 그 속단조차 통일되지 않아서 한쪽에선 한남이라고 욕먹고 한쪽에선 메갈이라고 욕먹는 일도 벌어진다. 이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요한 것은 뭐가 옳은지, 그게 왜 옳은지에 대한 확실한 자신의 입장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 입장을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 설명을 사회적 설득의 과정으로 확대하면서 어떤 주의나 주장을 사회적으로 펼치는 “운동”에 참여할 것인가 하는 것이 최종적인 문제가 되겠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과연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 걸까?

 

난 지극히 보수적인 집안에서 4남 2녀 중의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 형이 셋, 누나가 둘. 동생만 없다. 내가 집안에서 대접을 받았다면 막내라서 귀여움을 받은 것이고, 집안의 형편이 꾸준히 나아지는 과정에서 제일 늦게 태어났으니 경제적으로는 제일 편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그게 나한테 어떤 큰 영향을 주진 않았을 것 같다.

 

거기다가 집안 분위기는 조금 독특한 인생관(사실 지나고 돌이켜 보니 돌아가신 아버지의 인생관은 대단히 훌륭한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을 가진 아버지 덕분에 집안 내에서 성차별이 그리 심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물론 당시 시대적인 배경에 비추어 봤을 때 그렇다는 거지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성차별이 없었을 리가 없다. 그저 딸이라고 낙태해 버린다거나, 학교를 안 보낸다거나, 아들 학비 대느라 딸을 공장에 보낸다거나, 집에서 밥이나 청소는 딸만 하라고 시킨다거나 하는 일만 없는 수준이었다고 보면 된다.

 

몇 번 얘기했었지만 아버지의 인생관은 자신의 손으로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하는 자는 남에게 그걸 시킬 자격도 없다는 것.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집 고치고 하는 것은 아들들이 먼저 배워야 했던 그런 가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게 모르게 집안일들은 여성들의 차지가 되곤 했지만..

 

그런 가정에서 자라나고 남중 남고를 나왔으니 난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그렇게까지 여성들을 학대하고 차별하고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몰랐던 것 같다. 그저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공부를 좀 덜해서 대학을 덜 오는 줄 알았을 뿐이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오면서 내가 알게 된 세상은 사뭇 달랐다.

 

제일 처음 느꼈던 충격은 여학생이 담배를 피운다고 잘 알지도 못하는 남학생이 선배랍시고 쫓아가서 담배를 빼앗아 꺼 버리고 뺨을 때리는 광경을 목격했던 경험으로 다가왔다.

 

우리 집안 여성들은 담배를 안 피웠다. 아버지가 특별히 못 피우게 한 것 같진 않은데 만약 피웠다면 혼은 났겠지. 아들들도 다들 중고딩 때부터 담배를 피웠으면서도 집안에서는 안 피우는 척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담배는 개인의 기호품이며 누구나 피고 싶으면 피는 게 맞다고 생각을 했는데 단지 여학생이라는 이유로 그게 캠퍼스 내의 큰 길가에서 누구나 보는 공간에서 뺨을 맞아야 할 정도로 나쁜 짓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이해하기 힘든 일을 보면 그냥 넘어가질 못하는 내 버릇이 발동된 것은 그 이유일 뿐이다.

 

사이에 끼어들어 화를 내면서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선배한테 대들었던 나에게 선배는 “천륜”이라는 표현을 했던 것 같다. 하늘의 윤리? 여자가 담배 피우면 뺨 때리고 담배 빼앗아 버리라고 하늘이 정했다고? 미친 거 아냐?

 

과에서, 또 동호회(당시에는 서클 혹은 동아리라고 불렀다.) 등에서 이런저런 여학생들을 만나고 그들과 대화하면서 알게 된 그들의 세상은 내가 알던 세상과는 사뭇 달랐다. 대학을 오기 위해 집을 나와야 했던 친구도 있었고, 남동생들 학비 대느라 알바하다 지쳐 휴학하는 친구도 있었다. 남동생들은 알바를 왜 못하지?

 

당시에는 알바로 학비 대는 게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이 세상의 불의를 제거하고 뜯어고치자고 생각하는 소위 “운동권”들의 커뮤니티 내부에서도 여성들은 이등국민이었다. 이등국민? 그냥 천민이라고 표현을 하자.

 

해일이 몰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는 유시민 작가의 표현, 무지하게 많은 욕을 먹었던 표현이지만 난 그표현을 처음 들을 때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저건 내가 86년 이후 내내 들어왔던 바로 그 개 같은 표현이다라는 느낌. 저 사람은 아직도 저런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구나 라는 느낌이었다.

 

당시 운동권들의 보편적인 마인드는 남한 사회가 신식 국독자, 신식민지 국가 독점자본주의인가 아닌가를 따지면서 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국가 권력을 독점하는 군부독재 세력을 어떻게 타도해야 할 것인지에 지나치게 골몰한 탓에 여성들이 소외당하고 착취당하고 있다는 얘기는 어디 스웨덴 같은 나라에서나 싸울 일이지 우리에게 시급한 문제는 아니라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똑같이 최루탄 연기 쐬고 눈물 줄줄 흘리면서 담배를 꺼내 물 때 여학생들은 어디 안 보이는 구석에 가서 담배를 피워야 되지 남들 앞에서 피우면 뺨을 떄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상태.

 

그러면서 시위 끝나고 뒤풀이 술집에 가면 여학생 후배는 그 자리에서 제일 끗발 높은 운동권 선배 옆에 앉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상태.

 

더 놀라운 것은 이런 문제를 의아하게 생각하던 내가 여학생 선배에게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자, 지금 당장 학우들이 군부독재와 싸우느라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여권 운동 같은 것은 조금 뒤로 미루어도 되지 않을까 라는 답이 왔다는 사실이다. 난 그 답을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게는 다른 무엇도 아닌 노예의 답변으로 들렸던 그 말들을 말이다.

 

주인님 사정이 급한데 내 문제야 뭐 좀 있다 사정이 좋아지면 얘기하지 뭐.

 

그 노예는 아마 평생 자기 문제를 얘기할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난 여성의 권리를 회복해 주고 싶었던 게 아니다. 자유로운 인간의 권리를 생각하고, 사람들의 권리를 짓밟는 부당한 군부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어째서 자기 바로 옆에 서 있는 억압당하고 있는 또 다른 인간의 권리는 외면하는가에 대한 답답함이었을 뿐이다. 내가 보기에 합리적이지 않은 일을 그냥 눈감고 넘겨 버리지 못하는 내 성향이 문제였다.

 

당시에 결국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 버리기로 하는 비겁한 타협을 하게 된다. 아무도 동의를 안 해주는데 어쩌라고? 얘기 꺼내면 나만 바보 되고, 아주 익숙한 비난을 듣게 된다. 이 비난은 요즘에도 많이 나올 것 같다.

 

저 새끼 여자들에게 잘 보여서 어떻게 한 번 해 보려고 저런 소리 한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보빨이라고 욕먹는 거다.

 

열정적으로 찾아서 읽던 페미니즘 관련 책들, 사실 당시에는 국내에 페미니즘 서적도 거의 없었다. 굳이 읽으려면 원서 찾아서 읽어야 되고, 읽고 있으면 또 욕먹는다. 그게 지금 중요하냐? 는 욕이 날아온다. 당시에는 어느 정도의 분위기였냐면 러셀의 책만 읽어도 회색분자 아니냐고 욕이 날아오던 시절이고, 수정자본주의 관련 책을 읽으면 변절하려고 그러냐고 욕이 날아오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나 자신도 페미니즘은 그냥 여자들이 알아서 하라 그러자,라고 손을 놔버리게 된 것이다.

 

마치 흑인 인권에 눈을 뜬 백인 소년이 처음에는 조금 열 받아서 이런저런 행동을 하다가 결국 이 문제는 흑인들 문제니까 흑인들이 알아서 하라 그러자고 포기하는 현상 같은, 그 비슷한 현상이 나에게도 일어난 셈이다.

 

그리고 세월은 순식간에 이십 년이 흐른다.

 

기구한 인생살이 끝에 난 또 엉뚱하게도 이승평론가네 뭐네 하면서 온갖 시사 사안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아는 척하면서 해설을 하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고, 거의 때를 같이해서 페미니즘은 다시 수면으로 급하게 떠오르게 된다. 물론 그전에 이를 위해 노력했던 수많은, 주로 여성이고 남성도 분명히 일부 있었을 그 페미니즘 운동가들, 페미니스트들의 노력에 힘입어 페미니즘은 이 삭막하고 낙후된 대한민국 사회에도 점차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이제 겨우? 20세기도 아니고 2017년에?

 

그만큼 우리 사회의 성차별의 벽은 높고 두껍고 강했으며, 그와 비례해 페미니스트 운동가들의 고통의 시간은 길고도 끝이 없었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그 분들의 노고에 작으나마 경외심 한줄기라도 표현을 하고넘어가기로 하자.

 

메갈리아가 등장하고 한 술 더 뜬 워마드가 등장하고,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인권에 대한 논의가 터져 나오고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혐오발언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정치적 올바름, PC 함에 대한 이야기들이 터져 나온다.

 

당연히 그에 대한 반작용도 함께 터져 나온다. 이 반작용이 나오는 것은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다. 어떤 이슈로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 반작용은 대단히 바람직한 청신호다. 이제 자신들이 주장하는 이슈가 사회적어젠다로 떠오르기 시작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사례로 기본소득을 보시라. 기본소득을 결사적으로 반대한다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등장했는가?

 

기본소득 주장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매도하는 집단이 등장했는가? 아직 없다. 그건 기본소득이 이 사회의 동의를 얻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아직 이 사회에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가 최소한의 비율로 퍼져 나가지도 못했다는 증거일 뿐이다. 반대가 없는 게 아니라 그런 아이디어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중이다. 기본소득 운동가들은 진짜 무릎 꿇고 반성해야 된다. 여태 뭘 했길래 반대 그룹도 아직 안 생겼어.. 하면서 말이다

 

어찌 되었거나 그렇게 페미니즘이 이 사회에 퍼져 나가면서 초기의 갈등 구조를 형성해 가고 있는 와중에 난 뭘 해야 하는가?

 

첫 번째. 나는 페미니즘에 대한 업그레이드된 지식이 없다. 나름대로 이 책 저 책 쫓아가면서 읽고는 있지만 제대로 체계적으로 여성학을 배우지도 못했고, 그간 페미니스트 운동가들이 쌓아 둔 이론적 업적에 대해 공부하지도 못했으며 그저 단편적인 지식만 몇 개 가지고 있을 뿐이다. 오죽하면 여성혐오, 미소지니라는 말이 SNS 공간에 막 퍼지기 시작했을 때 그 말이 뭔 뜻인지도 몰랐을 정도이니 말 다했지 뭐.

 

변명하자면 내가 속한 세대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둥, 다른 거 공부하느라 바빠서 그랬다는 둥 하는 진부하고 치졸한 소리밖에 할 게 없다. 그렇다고 모르면서 아는 척하고 끼어 떠들 수는 없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거다. 모르면 잠자코 있는 게 남는 거라는 사실. 또 얘기해야 할까?

 

두 번째, 이건 좀 더 민망한 이야기인데, 나는 당사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건 진짜 어쩔 수가 없다. 흑인인권 운동가 중에 백인이 없는 게 아니고 여성 인권 운동가 중에 남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당사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 있게 그 대열에 함께 서려면 남들보다 훨씬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에도 수많은 “쓸만한 남성 지식인”들이 이 사회가 여성 문제에 있어서 얼마나 기울어진 운동장인가를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혼란에 빠져 있는 것이 뻔하게 보인다. 다른 문제에서는 냉철하고 객관적이면서도 남녀 간의 차별과 착취 문제에 대해서는 관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여성이 차별받는 게 아니라 남녀의 역할이 다를 뿐이지, 뭐 이런 개소릴 늘어놓고 있는 거, 뻔히 보이지 않는가. 그게 바로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빠지게 되는 함정이라는 얘기이다.

 

이 당사자가 아니라는 문제를 극복할 자신이 없다. 어차피 이제 와서는 이승평론 자체를 그만둬야 할 시점이니 더욱 힘들다. 그래서 할 말이 없다.

 

세 번째, 이건 좀 더 현실적인 문제인데, SNS 공간에서 어차피 나는 50대 남성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이건 개저씨로 직결된 개념이 된다. 거기에 고은태 사건 이후로 나는 개저씨 여혐종자로 찍혀 버린 상태라는 거 잘 알고 있다. 거기에 이 사회의 가장 개꼴통 마초 집단인 딴지일보 출신의 평론가다. 거기다가 맨날 하는 게 정치 얘기니 특정 정파에 속한 사람들하고 쌍소리 해가면서 싸워온 게 하루 이틀이 아니다.

 

이런 내가 어느 날 갑자기 페미니스트 전도사 같은 발언을 한다고 상상해 보시라. 그게 나한테 도움이 되겠는가, 페미니즘 진영에 도움이 되겠는가.

 

저 새끼가 늙더니 욕 안 먹으려고 변신한 척하네, 안 속는다 이 늙다리 미치광이야!!

 

이런 소리밖에 더 듣게 되겠는가?

 

나는 은근히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 있는 사람이다. 뭐 미친 듯이 노력하고 자기 증명을 반복하고 수도 없이 글을 쓰고 페미니즘 사안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분노하고 같이 싸우고 그러면 언젠가는 이미지를 바꿀 수 있겠지. 그러나 난 이제 그렇게 투자할 에너지의 여력이 없다.

 

무기력하고 나약한 모습이지만 이제 어쩔 수 없다. 당신들도 내 나이 되어 보시라.

 

그러니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조용한 응원뿐이다.

 

남자 후배들이 가끔 물어온다. 요즘 메갈이라고 부르는 그 여성들이 주장하는 페미니즘은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는 질문이다. 아주 흔한 질문이기도 하다. 난 주로 이렇게 대답한다. 이 사회의 운동장이 너무 기울어져 있어서 너는 아직 뭐가 문제인지도 인식을 못하고 있는 거라고. 그러면 은근히 놀라는 눈치를 보인다. 이런 답변이나 하는 게 바로 그 조용한 응원에 속한다.

 

다른 명망가들이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발언을 한다면 그 발언을 알리고 동의한다는 표현이나 가끔 한다. 쓸만한 페미니즘 책이 나온다면 사서 천천히 읽어본다. 뭐 그런 것 정도.

 

내가 할 수 있는 맥시멈은 딱 그 수준뿐이다.

 

그저 단 하나. 이 땅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조금이라도 더 수평을 찾길 원할 뿐이고, 그 말은 바로 이 땅의 여성들이 조금이라도 차별, 혐오, 착취를 덜 당하는 사회가 되길 바랄 뿐이라는 뜻이다.

 

이제 다 때려치우고 아무것도 안 할 것처럼 말하면서 그런 건 또 왜 그렇게 바라냐고?

 

이 사람아, 난 딸을 가진 아빠잖아. 내가 살아온 이 세상은 바로 내 딸이 살아가야 될 세상이거든. 내가 살아왔던 그 상태라면 난 딸에게 넌 절대 이 세상에서 살지 말고 다른 세상을 찾아 떠나라고 할 수밖에 없거든.

 

그래서 내가 못 고쳤으니, 당신들이라도 고쳐주길 부탁하는 거잖아.

 

미안하지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인데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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