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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낫투데이]

낫투데이 20170916

박성호
2017-09-16 16:0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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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이런 얘길 시작하면 또 바로 반응이 옵니다. 왜 부정적으로 그런 걸 생각하느냐, 그러지 말고 완치될 거라고 생각해라,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기에도 인생은 부족하다, 등등..

 

아니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거 좋고 희망을 갖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닥쳐올 현실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맞닥뜨려 생각하는 것도 필요한 법입니다. 사람은 “추상”의 능력이 있는 존재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는 “품위 있는 마감”으로써 죽음에 대한 대비를 미리 해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동물 중에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상상하고 준비하고 대비하는 존재는 아마도 사람밖에 없을 겁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처럼 구체적으로 자신의 종말, 자신의 소멸에 관해 미리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만큼 지적인 능력이 있는 동물은 없을 것 같아요. 영장류 중에 가능한 동물이 있을지, 아니면 돌고래나 코끼리 등이 그게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히 입증된 바는 없겠죠.

 

그런 면에서 보자면 내 인생이 끝나는 순간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미리 생각하고 주변인들과 의견을 교환한다는 것은 인간만이 가진 특권일 수도 있습니다. 그 특권을 좀 누려볼 생각입니다.

 

건강할 때에도 죽음에 관해서 많이 생각을 했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중요한 주제거든요. 내 삶의 시작은 어땠는지 모릅니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생겨났고 태어난 뒤로도 한참 동안은 “자아”를 가지지 못하고 길러졌기 때문이죠. 어느 순간 세상과 내가 구분해서 인식이 되기 시작하고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인식 되며 나 자신이라는 존재에 관한 인식이 정립되는 순간, 즉 자아가 만들어지는 순간이 내 인생의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순간은 애매하고 불확실하죠.

 

그 뒤로 나라는 존재는 자아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왔고, 그 인생은 언젠가는 반드시 끝이 납니다. 이를 일컬어 옛 선인들은 “발라 모굴리스(Valar Moguhlis,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의미를 가진, 드라마 왕좌 의 게임에 나오는 속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이게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인간이라는 종이 지구 상에 등장한 이래 죽지 않은 인간은 없습니다. <맨 프롬 어스>나 <하이랜더> 등의 창작물에서는 이 절대법칙을 넘어선 존재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죽지 않는 존재는 없지요.

 

인간뿐 아니라 모든 동식물은 다 죽습니다. 언제 죽느냐 하는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언젠가는 모두 다 죽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죽음의 순간, 내 자신이라는 존재의 종말, 결국 나에게 있어서는 이 모든 세상의 종말과 다름이 없는 절대적인 종말의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은 “반드시” 해야 하는 질문이며, 언 제 어느 순간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 모르는 현대사회에서 이 질문은 빨리 할수록 좋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젊고 건강할 때에는 이 질문을 진지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진지하게 하더라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아요.

 

저는 젊어서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자살을 생각해보고 실행에 옮겼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답을 얻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저 현실 세계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해서 도피를 하려고 했던 것 같다는 기억만 남아 있죠.

 

그러나 이제 오십 년, 흔한 표현으로 반백년을 살아왔고 언제 갑자기 죽어도 별로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진짜 어느 순간 갑자기 종양이 급하게 재발하면서 치명적인 영향을 주고 그로 인해 중태에 빠 지고 병원에 실려가 몇일만에 생을 마감하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인 겁니다. 암환자라면 모두가 다 이런 상상 을 하게 될 겁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완치율, 즉 5년간 생존율을 따져 보면 그리 높지 않은 것을 압니다. 반 이상이 5년을 못살 고 죽는다는 거죠.

 

스티븐 제이 굴드는 “메디안(중간값)은 메시지가 아니다”라는 칼럼에서 이에 관해 재미 있는 의견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만 뭐 어떻게 해석을 하더라도 암환자들은 자신의 죽음을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마주치게 될 것이라는 점에는 크게 이견이 없습니다. 완치되어 십 년 이십 년 사시는 분들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비율은 일반인에 비해 현저히 낮은 것이 사실이죠.

 

이렇게 되면 생각하는 자세 자체가 달라집니다. 막 생각하다가도, “에이, 뭐 아직 죽으려면 멀었지, 나중에 다시 생각하자”라며 생각을 치워버릴 수가 없게 된다는 겁니다. "분명히 멀지 않은 시점에 죽게 될 거야, 그러면 나는 그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 걸까?"라는 생각을 “매우 진지하게” 하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진지하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답은 없습니다. 의연하고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가능한 얘기겠죠. 그런데 왜 그래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죽기 싫어서 발버둥 치며 마지막 순간까지 살기 위해 온갖 노력 을 다한다? 이 역시 허무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그래 봐야 얼마나 차이가 나겠냐는 거죠.

 

품위 있는 죽음이라는 말은 폼은 나긴 하는데 어차피 잠시 후에 무의 세계로 돌아갈 인간이 그 품위를 가져다가 어 따 쓰겠냐는 겁니다. 후손들에게 폼 잡으려고?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이런 허무함이 만드는 빈틈에는 꼭 종교적인 조언이 비집고 들어오기도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무로 돌아가 는 것이 아니고 분명하게 사후세계가 존재하며 그 사후 세계를 위해 할 일이 있다는 거죠.

 

종교를 가지신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이 되질 않습니다. 환원론이라고 부를 것까지는 없지만 인간은 결국 생명체이고 거의 대부분 물과 단백질 화합물로 구성된 존재이며 인간의 지성은 뇌의 전기화학작용의 결과물이고 인간이 생명을 다한다는 것의 의미는 한 개체의 생 명활동이 중단되고 뇌의 작동이 중단되고 몸, 육신은 부패해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프로세스가 시작된다는 의미라고 생각을 합니다.

 

결국 사후 세계 같은 것은 그저 인간이 자기 위안을 얻기 위해 만들어낸 창작물이 라고 생각을 한다는 거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다시금 굉장히 허무해집니다. 꽤 긴 시간 동안 이 세계에 존재하면서 그래도 뭔가 를 한다고 하면서 발버둥을 치고 살아왔는데 한 순간 내 삶이 끝나 버리면 완전하 무로 돌아가고 내가 보고 듣고 느끼던 나의 세계는 사라지는 것이며 나는 그저 나를 아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다가 그들 역시 삶이 끝나버리면 완전히 사라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진짜로 허무하죠.

 

그런데 이 허무함에 생각이 사로잡혀 버리면 안 됩니다. 그렇게 허무하다면 죽음의 순간이 십 년 아니 오십 년 뒤에 있다고 하더라도 안 허무한 것은 아니죠. 나이 스무 살 먹고 앞으로 내가 오십 년 살지 육십 년 살지 모르지만 어차피 죽으면 말짱 황인데 뭐하러 열심히 살겠냐고 생각하는 게 결코 옳은 생각은 아니잖아요?

 

그러면 오십 년 남으면 안 허무하고 1년 남으면 허무한 걸까요? 시간의 차이가 의미가 있을까요? 인간은 모두 죽습니다. 이건 대자연의 원칙이고 누구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철칙입니다.

 

거기에 하나 더 있습니다.

 

그 죽음의 순간이 언제 다가올지는 지금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위기에 빠진 사람이라도 알 수 없 는 거라는 점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누구나 죽는데 그 시점은 아무도 모른다.. 이거 진짜 절묘한 신의 한 수입니다.

 

죽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해서 그게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스무 살 먹은 청년이 저보다 반드시 오래 살게 될까요? 그 청년은 내일 아침에 교회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무서 운 일이죠. 반드시 죽는다는 것도 인간의 한계고, 그 시점이 언제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 또한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한계죠.

 

그렇다면 우리는 그 두 가지는 그저 기본 상수로 두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저는 이 두 가지의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순간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 죽겠지, 그런데 언제인지는 모르는 거잖아. 죽음이 남들보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것은 맞는 거 같은데 그게 또 언제 연장이 될지도 모르는 거고, 어쩌면 내일 당장 올지도 모르는 거고 다 모르는 거지"라는 생각이 든 겁니다.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는 나름대로 합니다. 각오도 하고, 내가 죽은 다음에 가족들은 어째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도 하고 얘기도 해 봅니다. 처음에는 좀 꺼내기 힘든 주제이긴 한데, 하다 보면 익숙해집니다. 그렇게 내 자신의 인생의 끝에 대해서 자꾸 적응을 할수록 두려움의 폭은 적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을 더 충실하게 보내겠다는 다짐을 하는 거죠.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다시 생각을 합니다. "오늘 하루는 괜찮겠군. 오늘은 아닌가 보다. 낫 투데이다" 그러면서 또 하루치 분량의 삶을 살아갑니다. 통증이 있고 몸도 약해지고 해서 아닌 거 같지만 어쩌면 제가 건강 한 여러분들보다 하루하루를 훨씬 더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몰라요.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거든 요.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그런 생각의 결과물인 셈이죠.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솔직히 슬프기도 하고 겁도 나고 그러죠.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훨씬 더 견딜만 합니다.

 

가끔 제가 농담도 하고 컨디션이 좋아졌다고 하면 많은 분들이 완치될 거라고 위로를 해 주시는데 그런 얘기 들으면 솔직히 약간 속상합니다. 완치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그리 쉬우면 암이 왜 무 서운 병이겠어요. 완치 같은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무섭거나 하지는 않아요. 그저 오늘 하루 좀 덜 아프고 정신이 맑아서 좀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랄 뿐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오늘 하루치의 인생을 살아가기에는 부족함이 없거든요.

 

그리고 때가 오면 “아, 이제 그때가 왔 나 보다”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이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모여서 십 년 이십 년 살게 될 수도 있죠. 그건 그거대로 또 좋은 일이니까요.

 

이런 생각이 아마 많은 분들에게 잘 전달이 안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게 제가 내린 최선의 결 론이고, 제가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가장 합리적인 생각이라고 봅니다. 아마,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산티아고 노인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살아봐야 일 년을 살겠어, 십 년을 살겠어, 그러니 이제 포기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고, 모르는 일 가지고 안달복달하지 말고 나는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살겠다"라는 것이 진정한 인간의 자세라는 겁니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결코 무릎을 꿇진 않거든요. (by 헤밍웨이)

 

여러분들도 포기하지 마세요. 포기하는 것은 절대 멋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위대함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그 끈질김에 있는 법입니다. 그렇게 끈질기게 살아가는 거죠. 우리 모두는 인간이니까.

 

2017.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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