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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천재들만의 몫인가

박성호 a.k.a. 물뚝심송
2018-03-20 10: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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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히든 피겨스는 매우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바로 실생활에서의 차별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어디 먼 나라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사회에는 이미 여성차별이 없으며 오히려 여권이 너무 신장되어 역으로 남성들이 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남자들이 와글거리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진짜 문제가 되는 차별은 사람들이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는 차별이다. 차별을 하는 쪽에서 아예 인식도 못하고 있는 차별은, 당하는 쪽에서는 그만큼 더 가혹하고 무서운 법이다.

 

극 중에서 주인공 캐서린 존슨이 그 바쁜 와중에 800M 떨어진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까지 비를 맞으며 뛰어갔다 와야 되는 현실은 스크린 밖의 우리에게는 너무나 어이없는 차별로 바로 인식되지만 영화 속의 백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관습적인 현실이었을 뿐이다. 그게 차별이라고 인식하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실제로도 그랬다. NASA에서는 인종차별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그러면서 캐서린이 자신들의 포트에서 커피를 함께 마시는 것조차 불편해서 다른 커피포트를 하나 더 준비하는 행동을 자연스럽게 한다. 차별이라고 인식하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그들이 "이제 우리 부서에 흑인 여자가 하나 들어왔으니 차별을 해야지."라고 마음을 먹고 그랬을까? 아니면 해오던 대로 아무 생각 없이 이게 자연스럽지, 하면서 커피포트를 추가한 것일까?

 

케빈 코스트너가 연기한 알 해리슨이 유색인종 화장실의 표지판을 때려 부수며 "여기 NASA에서는 모두 같은 화장실을 쓴다."라고 얘기하는 순간, 관객인 우리들은 감동을 했지만, 당시의 백인 NASA 직원들 중 상당수는 "어떻게 흑인들과 같은 화장실을 함께 쓰란 말인가.."라며 "역차별"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만큼 변화는 어렵다. 그러나 그 변화는 누군가는 반드시 이루어야 할, 반드시 이룰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다. 문제는 도대체 언제 그 변화가 오는가 하는 것뿐.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캐서린 존슨은 수학의 천재이다. 도로시 본은 흑인 여성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당시 처음으로 도입되는 IBM 컴퓨터를 프로그램하는 법을 스스로 공부해서 깨우칠 정도의 능력자다. 메리 잭슨은 흑인 여성 최초로 NASA의 엔지니어를 꿈꾸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캐서린 존슨이 부서장 해리슨의 눈에 띌 정도로 탁월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면 이런 변화가 왔을까? 도로시가 그 바쁜 업무 속에서도 IBM의 매뉴얼을 독학하고 포트란 프로그래밍을 공부하지 못했다면 동료 흑인 여성들의 일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을까? 메리가 판사를 설득하지 못했다면 백인들만 들어가는 대학 커리큘럼에 최초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

 

이 영화를 보며 감동을 느끼면서, 정말로 흑인들이 저런 차별을 받아 왔다는 사실에 놀라고, 책에서 글로만 봤던 차별이 실제로 저런 거였구나 하고 실감 나게 느끼면서도 한 편으로 아쉬움과 답답함이 느껴졌던 부분이다.

 

흑인은 백인과 동등해야 한다. 같은 사람이니까 말이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해야 한다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같은 사람이니까.

 

그런 관점에서 차별을 반대하고, 차별적 관습을 없애는 쪽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당연한 일을 해 나가는 선봉에 그저 흔한 일반인들이 서지 못하고, 탁월한 천부적 능력과 남들이 따라 할 수 없는 성실성, 그리고 결단력 등을 갖춘 비범한 사람들이 서 있는 모습을 보며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나뿐인가 싶다.

 

물론 시작이라서 그런 것이겠지. 처음에 거대하고 단단한 벽에 흠집을 내고 허물어 내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비범해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비범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변화는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비범한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이런 일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까지이지 이게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진 못한다.

 

진정한 변화는 지극히 일반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져야 한다. 아니 오히려 평균보다 못한 사람들에게까지 변화의 물결이 도착해야 그때 비로 세상이 변했구나 하는 인식을 가지게 된다.

 

백인보다 일을 훨씬 잘하는 흑인뿐 아니라, 똑같은 흑인들, 오히려 더 못하는 흑인들까지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 되어야 차별이 없어졌다고 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현실의 미국은 아직도 그런 단계에 가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남성보다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여성들 뿐 아니라, 동등하거나 오히려 업무 능력이 떨어지는 여성들까지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지 않아야 진정한 성평등이 이루어진 사회가 되는 것이지만 우리 사회는 그 첫걸음도 아직 떼지 못했다.

 

사뭇 감동적인 영화 "히든 피겨스"를 보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아쉬움이 남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변화는 천재들만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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