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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박성호 a.k.a. 물뚝심송
2012-08-16 16:3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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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의 이름이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험난한 시대를 올곧은 정신으로 살아낸 남자, 보기 드물게 지성과 강인함을 함께 갖추었던 사람. 박정희 독재정권에 가장 치열하게 저항하다가 스스로의 목숨까지 던져버린 이 장준하의 삶은 우리에게 묘한 울림을 준다. 
 
예순일곱번째 광복절을 맞아 이 사내의 이름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사람들은 “죽은 장준하가 살아있는 공주를 잡는” 다고 희망섞인 얘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새삼 다시 거론되는 장준하의 이름이 박근혜의 지지율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것 같지는 않다. 박근혜의 지지율에는 박정희의 온갖 문제들이 이미 다 반영이 되어 있다고 탄식하는 고종석의 의견은 옳다. 박근혜는 꿈쩍 안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 장준하의 이름은 역사를 상징한다. 
 
역사는 잊혀지지 말아야 하며 단절되지 말아야 한다. 이어져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잊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누군가는 역사를 기억하고 전달해야 하며, 그 흐름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리라. 
 
달이 떠오른 밤에 마당에 피워놓은 불가에 모여 앉은 구경꾼들 앞에서 구전되는 노래로 역사를 들려주던 광대들의 심정으로, 부정확하더라도 내가 아는 장준하라는 이름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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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는 장준하다. 정준하도 아니고 장하준도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 이거 헷갈리는 사람들 꼭 있을 거다. 
 
그나마 장준하의 이름 석자가 최근 공중파에 울려 퍼졌던 것은 다름아닌 문성근이 출연한 “무릎팍도사” 때문인 것 같다. 거기에 문성근 본인의 부친인 문익환 목사, 문익환 목사와 어려서 한 동네에서 자란 윤동주 시인, 또 하나의 친구 장준하, 이렇게 셋의 이름이 나란히 나왔던 것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뒷줄 왼쪽부터 장준하, 문익환, 윤동주다. 
그렇다면 앞줄에 가오잡고 앉아있는 친구는 누구란 말인가… )
 
어디서 한번씩 들어본 사람들이 서로 친한 친구였다니, 이런 얘길 듣게 되면 사람들은 좀 솔깃해진다. 
 
그러나 그 셋은 얼마 못가 서로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문익환은 신학에 더 열중하게 되었고, 장준하는 일본군에 입대하게 된다. 그리고 통크게도 (사실은 문학적 상상력이 큰 것이었겠지만..) 군 내부의 반란을 꿈꾸던 윤동주는 일본 도시샤 대학 재학중이던 1943년에 일경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고문후유증으로 먼저 세상을  뜬다. 동료의 밀고로 체포되었고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었다고도 하는데.. 
 
그리고 장준하는 예정대로 탈영을 하고 김구를 찾아가게 된다. 
 
장준하는 애초에 일본군에 자원입대 하면서도 일본을 위해 봉사할 마음 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혈서를 써가며 일사봉공(한번 죽음으로써 조국에 봉사한다.)의 마음으로 지원한 박정희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뭣이? 그 박정희가 나중에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다고? 그게 나라야? 젠장..
 
장준하는 자신이 입대를 기피하게 될 때, 가족들에게 밀어닥칠 우환을 막기 위해 동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스스로 입대를 결행하던 순간에 이미 탈영을 결심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암호까지 정해주고 간다. 
 
한겨레의 보도에 따르면, 그 암호는 바로 “내가 형제와 골육을 위하는 일이라면 비록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하여도 이는 원하는 바이라” 라는 성경구절이었다고 한다. 이 구절을 아내에게 적어주고, 만약 자신이 보낸 편지에 이 구절이 적혀 있게 되면, 그게 바로 탈영에 성공했다는 뜻으로 알라고 얘기를 해 줬다는 것이다. 
 
부부간에까지 암호를 정해두고 얘길 하다니, 뭔가 굉장히 낭만적인 일처럼 들리지만 만약 저게 나한테 지금 불어닥친 현실이라면 낭만적인 얘기로만 듣기는 어려울 것 같다. 
 
결국 장준하는 윤동주와는 달리 탈영에 성공한다. 일본군 시절, 장도영을 만나기도 했던 장준하는 장쑤성 쉬저우에서 탈영에 성공하고, 안후이성 임천으로 가서 3개월간 군사훈련을 받고, 쓰촨성 충칭의 임시정부에까지 가게 된다. 몽땅 걸어서.. 
 
대륙의 스케일 따위, 젊고 건장한 장준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겠지. 겨우 2,400km 밖에 안되는 거리니까 간단히 한 두어달 열심히 걸어가면 그 정도야 뭐.. 도시마다 검문하는 일본의 눈길을 피해가면서 가노라면 스릴도 있고 말이다. 
 
이 때 함께하던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었다. 
 
 
(가장 오른쪽의 부리부리한 얼굴이 장준하, 가운데가 나중에 고려대학교 총장까지 지낸 김준엽, 맨 왼쪽이 노능서. 물론 이 사진은 나중에 이들이 광복군 소속의 신분으로 미국 OSS 특수훈련을 받던 시절의 모습이다. )
 
그렇게 찾아간 임정에서도 장준하의 입장은 그리 순탄치 않았던 모양이다. 김원봉같은 극렬한 테러리스트의 행동에도 불만이 있었고, 임정 내부의 권력다툼에도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었다. 김원봉은 장준하를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나중에는 장준하가 김원봉을 비난하고 나서서 김구가 말리는 상황까지 벌어졌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결국, 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이 개시되기 시작했고, 장준하는 서안으로 가서, 미군의 특수교육을 이수하고 특수공작원의 신분으로 임무를 대기하다가.. 
 
일본이 갑자기 항복해버리는 바람에 몽땅 도루묵이 되어서 국내로 귀국하게 된다. 
 
이 시절의 경험은 아마도 젊은 장준하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 문약한 문인의 자세가 아니라 강건한 육체적 힘을 바탕으로 한 무인의 자세가 몸에 배었을 것이고, 침투, 폭파, 무선 등 파괴와 암살을 위한 군의 특수교육을 이수하기도 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임정의 요인들을 찾아가 회고담을 듣고 기록하며, 그것을 기반으로 나중에 등장하게 될 사상계의 원조격인 등불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기도 하는 언론인의 역할도 이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극단적인 문인도 아니었으며, 김원봉같은 극단적인 무인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문무를 겸비한 장준하는 해방이후 어떤 길을 가게 되었을까? 
 
뭐 틀림없이 아주 복잡한 경험을 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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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후 장준하의 행적은 말 그대로 다사다난하다. 
 
김구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한 장준하는 김구의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고, 김규식과 함께 일을 하기도 했다. 젊고 강했던 장준하를 원하는 사람들은 곳곳에 많이 있기도 했을 것이다. 
 
한 때, 김구의 양해를 얻어 이범석의 족청에서까지 활동을 하기도 했다. 맞다. 서북청년단 만큼은 아니지만 사람 잘 족치기로 유명한 그 족청(조선민족청년단)이다. 물론 오래 있지는 않았고 금방 그만두게 된다. 
 
전쟁 이후에는 이승만 정부에서 공무원(4급 서기관)으로 일을 하기도 했고, 이런 저런 정치적 활동을 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원류는 사상계라는 잡지를 발간하는 것에 있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사상계는 온전히 장준하의 힘으로 일구어낸 최고의 성과였으며, 이 사상계를 통해 장준하는 사회적 발언을 지속하게 되며, 나중에 막사이사이상까지 수상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 시절의 장준하에게는 너무나 많은 일들이 순식간에 벌어졌었으며, 그 과정을 하나하나 기록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에도 걸맞지 않은 관계로, 여기서는 다들 궁금해 할만한 장준하와 박정희의 관계에 주목해 보기로 하자. 
 
장준하는 과연 박정희를 알고 있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는 두가지 이견이 존재한다. 하나는 백기완의 저서에 등장하는 미리 알았다는 설, 또 하나는 장준하의 아들 장호권씨가 주장하는 미리 알지 못했고, 남로당 시절에야 겨우 알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백기완의 주장은 장준하의 측근이었던 이철우의 증언에 기반을 하고 있다.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 광복군 시절에, 일본군 출신들이 대거 광복군에 합류했는데 그 무리중에 박정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박정희가 일본군 관습처럼 병사들을 구타하는 모습을 본 장준하가 박정희에게 호통을 치자, 박정희가 잘못했다고 말을 하는데 일본말로 사과를 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장준하는 광복군에 있을 자격이 없는 일군 출신들이 많이 들어왔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을 전부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5.16 과정에서 장준하가 박정희의 사진을 알아보고 함석헌 등에게 이 사람은 일본군 출신이니 행적을 알아봐야 한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장준하의 아들 장호권은 부친이 박정희를 미리 알지 못했었다고 주장을 한다. 남로당 사건때 처음 알게되었다는 주장이다.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철우의 증언에 기반한 백기완의 주장은 역사적으로 큰 모순이 없다. 박정희는 분명히 일제 패망시기까지 일군에 있다가, 막판에 일군의 조직이 붕괴되면서 광복군에 합류했던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그 혼란했던 시절에 만났던 일개 탈영장교인 박정희를 장준하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더우기 아들에게 그런 얘기를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사실이 어찌되었든 간에, 장준하와 박정희의 역사적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일화라는 점에서 소개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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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뭐라고? 이제 겨우 본문이라고? )
 
과연 장준하에게 박정희는 어떤 존재였고, 박정희에게 장준하는 어떤 존재였는가 하는 점 말이다. 
 
– 같은 일본군 출신이다. 장준하는 기껏해야 학병출신 병사였을 것이고, 박정희는 정식 일본군 장교였다. 장준하는 가족의 피해를 막기 위해 자진입대를 했고, 박정희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혈서를 써가며 입대를 했다. 
 
– 장준하는 목숨을 걸고 탈영을 해서 광복군에 합류했고, 박정희는 일본이 패망을 하자 패잔병이 되어 광복군에 합류를 했다. 
 
– 장준하는 김구의 비서실장으로 일하고 이범석의 족청에서 활동을 할 정도로 우파 민족주의자였으며, 박정희는 자신의 형과 함께 남로당 중책을 맡고 있다가 발각되면서 동지들을 밀고하고 살아남아 군에 들어가게 된다. 
 
– 그리고 장준하는 사상계라는 잡지를 만들어 우리나라의 해방이후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크고, 박정희는 해방이후 남한 최대의 독재자가 된다. 
 
– 장준하는 훤칠한 키에 눈이 부리부리한 훈남 스타일이고, 박정희는 조막만한 키에 썬그라스를 즐겨 쓰는 외모 열등감의 소유자였다. (이건 그냥 인상비평이니 넘어가도록 하자. )
 
그러던 장준하는 5.16이 발발하자 군사혁명을 지지하는 것으로 읽힐 수도 있는 글을 사상계에 발표하게 된다. 
 
이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장준하의 판단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는 매우 현실적인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었다. 전쟁에 대한 그의 입장은 당연히 받을 채찍이었다는 말로 표현이 된다. 즉, 해방이후 민족 내부의 분열상에 대한 그의 비관적 견해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비록 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었지만 이 땅이 “공산역도”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된 점을 감사하기도 한다. 
 
반공의 징후가 강했던 김구 밑에서 일을 했기에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지만, 장준하는 자신의 눈으로 본 현실을 우선시했던 현실주의자였다. 
 
그런 관점에서 극도의 혼란에 빠져 마비된 사회 기능을 회복할 줄을 모르고 있던 4.19 직후의 민주당 정권에 대해 그가 가졌던 불신감의 기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던 상황에 젊은 군인들이 “혁명”을 일으킨 것에 대해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유추가능하다. 
 
그러나 장준하가 군사혁명에 가졌던 현실적인 기대는 며칠 못가 배신당하게 된다. 박정희가 약속했던 민간으로의 정권이양이 구라로 드러난 것이 가장 컸을 것이다. 거기에 박정희 군사정권은 장준하를 부정축재사범으로 몰아가게 된다.
 
결국 장준하는 이들에 대한 지지를 접게 되고, 이어서 계속 벌어지는 군사정권의 독재스러운 행태, 한일회담문제라거나, 월남전 문제, 등등이 계속 누적되면서 가장 강력한 반정부 세력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사안에 따라 박정희 정권에 가장 강력한 반대의 목소리를 낸 것은 바로 사상계였다. 이로 인해 장준하 본인도 감옥을 들락거리게 되고, 사상계 역시도 수시로 세무조사를 당하고, 반품작전을 당하기도 하고.. 
 
반품 작전이라는 것은 일반 서점이나 책 도매상을 통해 정보기관에서 대량의 주문을 내고 책을 받았다가 한달이 지난뒤 몽땅 반품을 하는 수작이다. 당시 동아일보가 10만부 전후를 찍었는데, 사상계가 월 9만부 이상 나가는 수준이었으니 가히 우리 사회의 여론을 지배하는 압도적인 잡지였다. 이를 박정희 군사정권이 그대로 놔 둘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군사정권이 시작되자마자, 김종필을 시켜 장준하를 회유하려고 시도했었고, 이를 거절하자 부패사범으로 몰기도 하고, 그걸로도 부족하자 온갖 이유를 들어 감옥에 보내기도 하고, 또 반대로 막사이사이상 같은 회유책을 쓰기도 하고, 결국은 세무조사와 반품을 무기로 결국 사상계를 문을 닫을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장준하가 박정희 정권을 몰아내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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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는 박정희를 제거하기로 결심을 한다. 
 
그의 결심을 한마디로 보여주는 증언은 바로 장준하의 아들인 장호권에게서 나온다. 장준하이 75년도에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박정희를 깨는 것은 민중의 힘으로 역부족이니 게릴라전으로라도 박을 제거해야 한다. 군부 쪽에도 상당한 연계가 되어 있다” 
 
물론 이런 거사를 준비하면서 여기저기 자료를 남겨 놓을 일은 없다. 그래서 장준하가 실제로 박정희를 제거, 혹은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는지는 역사적으로 확증할 방법이 없다. 다만 당시의 정황으로 유추하는 것만이 가능할 뿐이다. 
 
결국 많은 사람들은 장준하가 75년 들어 중요한 신변을 모두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했으며 몇몇 지인들에게 모종의 큰 일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고, 그 일이 과연 어떤 일인지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뭔가를 준비하긴 했었구나 하는 정도의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장준하의 성격과 살아온 일생, 개인적인 능력과 훈련받은 경험, 그리고 박정희에 대해 가지고 있던 그의 부정적인 입장등을 총체적으로 고려하자면, 결국 장준하는 무슨 반정부 선언문을 발표하는 수준의 정치적인 거사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박정희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그리고 그 거사일은 원래 8월 15일, 광복 30주년 기념일로 정해져 있었으나, 마침 야권의 리더였던 김영삼이 외유에 나섰다는 이유로 그가 귀국한 이후인 8월 20일로 미루어졌다고 유추할 수 있었다. 
 
거기에 한 해 앞선 1974년도 8월 15일에는 문세광의 박정희 암살미수 사건이 있기도 했었다. 이 사건과 장준하의 숨겨진 거사의 연관성에 대해서 나름 조사를 해 보았으나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최소한 장준하가 이 사건을 보고 어떤 가능성을 확인했을 것이라는 생각까지는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아마도 박정희를 진짜로 죽이려고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서 이 계획이 정보기관에 접수되면서 거사일을 3일 앞둔 8월 17일, 장준하는 의문사를 당하게 된다. 난데없이 거사일을 앞두고 등산에 나갔다가 실족사를 당했다고 하는 정부의 발표도 말도 안되기도 하려니와, 사후 장준하의 가족들에게 가해진 탄압도 매서웠다. 
 
그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해외로 도피하기까지 했으며, 장준하 본인은 부검 절차도 없이 매장되고 말았다. 그리고 장준하는 이어지는 군사독재정권이 유지되는 동안 사회적 금기로 등극하고 만다. 장준하에 대해서는 모두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렇게 장준하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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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정권이 바뀌고, 장준하를 재조명하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산발적으로 있어왔다. 
 
하지만, 이미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고 장준하가 그렇게 생명을 바쳐가면서까지 제거하고자 했던 박정희 정권은 다시금 부활하려고 하고 있다. 박정희의 친딸이 여권의 가장 강력한 대선후보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장준하에게는 1991년이 되어서야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99년에는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지만, 그게 망자에게 어떤 위로가 될지는 잘 모르겠다. 
 
정보기관에 끌려가 두들겨 맞고 강제로 뿔뿔이 흩어졌던 유가족들의 고통은 아직도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장준하의 죽음에 대해서는 “진상규명불가”의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어떻게 우리는 불과 몇십년 전에 벌어졌던 비극의 역사에 대해서도 뭐 하나 확실하게 맺고 끊는 법도 없이 두루뭉수리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그러던 와중에 여러사람의 힘을 모아 장준하 추모공원이 만들어지고, 파주 나사렛 천주교 공동묘지에 누워있던 유골을 그 “장준하 공원”으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유족들의 요청으로 다시  부검이 시행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두개골 뒤쪽의 직경 5-6cm의 함몰흔적과 금이 간 흔적. 망치같은 둔기에 의한 타살의 혐의가 짙은 상태임이 밝혀진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이제와서라도 고인의 사인을 제대로 규명하고 책임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했을까? 
 
답은 부정적이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장준하의 죽음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사람의 큰딸이 지금 몇개월 지나면 우리 사회의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시라. 
 
하지만 알아는 두자. 알아두고, 잊지는 말자. 내가 잊지 않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사람들에게 얘기를 해서 기억을 시키자. 우리에게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말이다. 그게 우리의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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