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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가 된 유시민

박성호 a.k.a. 물뚝심송
2015-01-18 09: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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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딴지일보에서 발행하는 “더딴지”에 실렸던 글입니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여기에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

 

 

 

2013년 4월 18일, 대학로에 자리잡은 딴지일보 벙커원 지하 스튜디오에서는 한 중년 백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고, 그 목소리를 듣고자 모여든 이백 명을 훨씬 넘는 사람들이 유리창 밖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잘나가던 시사평론가를 그만두고, 2002년 “화염병을 들고 바리케이트 앞에 서는 심정”으로 정계에 투신했던 정치인 유시민이 십년이 넘는 직업정치인의 생활을 갑작스레 그만두고 나서 자신의 심정을 털어 놓는 인터뷰에 응했던 것이고, 나는 백수 유시민을 맞이하여 이런 저런 얘기를 들어보는 인터뷰 방송을 진행하는 진행자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 이 인터뷰 방송은 이 기사가 담긴 <더딴지> 통권 6호 발매와 동시에 “딴지 라디오”에 공개될 예정이다. *)

https://www.youtube.com/watch?v=yHrOyLnMqBo 

(딴지 사이트가 날아간 관계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정체불명의 유튜브를 링크한다.)

 

인터뷰를 준비하던 내 심정은 그랬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십년 넘게 하던 일을 그만둔다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죽음인 것이다. 물론 그는 또 다른 일자리를 찾아 자신의 역할을 찾아 옮기겠지만, 최소한 직업정치인 유시민은 죽은 것이다. 물론 그가 다시 정치를 재개할 수도 있다. 그러면 부활한 거고.

돌아가신 김대중 전 대통령도 두어 차례 이상 정계를 은퇴했었다. 박정희의 강압에 못 이겨 망명한 것도 어떤 면에선 강제 은퇴일 수도 있었고. 물론 그러고 나서 다시 부활해서 대한민국의 대통령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이다. 어떤 일을 그만둔다는 것은 최소한 그 분야에서는 죽는 것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이 바닥을 떠나는 그에게 작지만 따스한 선물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면서 살고 싶은지 들어주고, 그 내용을 사람들에게 널리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돌이켜봐야 쓰디 쓴 기억밖에 나지 않을 만한 정치판에서 벌어졌던 모든 일은 굳이 까발리고 싶지도 않았다.

최근에 새로 낸 책 광고도 좀 해 주고 싶었던 측면도 있다. 지금 그에게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바로 생계를 감당할 돈이라는 것이 뻔하니 말이다. 실제로 인터뷰 중에 그는 지금 당장 가장 곤란한 문제가 무엇이냐는 관객의 질문에,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동그라미”라고 답을 했었다.

실제로 유시민은 요즘 꼭 수입을 위해서만은 아니겠지만, 전국을 돌며 바쁜 강연일정을 소화하고 있기도 하다. 지상파 방송에 못 나갈 것이고, 언론사 인터뷰를 해 봐야 좋은 소리 안 나올 테니, 그저 자신을 찾아주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수밖에 없기도 하겠다. 그 강연비와 새로 출판된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책이 팔리면서 나올 인세가 그의 수입의 전부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수준은 아니라고 했지만, 품위유지에 급급한 수준의 수입일 것이다.

나 혼자만의 감정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그의 모습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은 뭔가 알 수 없는 서글픔이었다. 그래서 그랬다. 전통적인 딴지이너뷰 와는 사뭇 궤를 달리하는 물렁한 인터뷰를 하고 말았다.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랬더니 바로 지적이 나오더라.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딴지스럽지 않은 인터뷰였다는 반응 말이다.

그러나 정치인 유시민이 걸어왔던 십년의 과정을 제대로 복기하는 일은 또 다른 의미에서 필요하다. 그는 2002년에 시작된 뭔가 기존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정치를 진행하는 주역의 위치에 서 있었고, 결과적으로 그의 새로운 정치는 실패로 돌아갔다. 본인의 표현을 빌자면 “졌다”는 것이다.

그의 정치가 실패였다면, 왜 실패한 건지 무엇이 부족해서 실패한 것인지를 알아봐야 한다. 그리고 비록 실패했어도 뭔가 남겨 놓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도 있다. 만약 그의 정치실험이 실패한 수준이 아니라 해악을 끼쳤고, 남긴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치워 버려야 할 병폐를 남겼다면 그것은 또 그것대로 확인해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이 글이 그 모든 것을 다 담은 글이라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그저 쓸데없이 물렁한 인터뷰를 남긴 책임을 지기 위해 내가 아는 그의 모든 것에 대해 나름대로 비판적인 시각에서 정리를 해 보고자 하는 것 뿐이다.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자. 서로 힘들다.

 

유시민은 리버럴인가

맞다. 리버럴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따지기 이전에 본인 스스로를 리버럴로 규정하고 있다.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중간쯤으로 번역되는 리버럴의 정치적 정의는 그리 쉽지 않지만, 그가 해온 여러 가지 행동에 비추어 보면 그를 리버럴로 규정하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될 소지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유시민의 정치적 실험에 동참한 사람들, 즉 유시민의 지지자들도 모두 리버럴인가 하는 질문을 생각해 보자면 그것은 또 아니라는 점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아니 정계은퇴 직전까지 고집스럽게 남아있던 유시민의 지지자들, 시민광장의 회원들은 어쩌면 리버럴의 성격을 지닌 집단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2002년도에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 냈던 일련의 집단의 성격을 리버럴로 규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너무 게으른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노무현이라는 하나의 상징 아래 모인 그룹은 크게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자들과 또 다른 하나의 세력으로 나누어진다. 이 세력은 당시 한나라당을 극도로 싫어하며, DJ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는 새천년민주당 역시 그닥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새로운 정치를 꿈꾸며 노무현을 지지했었고, 기존의 정치인들 보다 노무현을 위해 새롭게 정치에 뛰어든 유시민을 열렬히 환영을 했었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주된 성향이 리버럴이었을까?

시사인의 천관률기자는 “좌절된 유시민의 리버럴 정치” 라는 기사에서 말하기를, 이들이 이어져 노무현이 명명한 “깨어있는 시민”으로, 또 친노라고 정의된 엘리트 그룹으로 이어지고 그들의 성향을 리버럴로 규정하면서 유시민의 정치를 리버럴의 정치라고 풀어내고 있다.

그러나 2002년 당시 “노사모”라는 이름으로 집결했던 하나의 세력은 현재의 “깨어있는 시민”이나 “친노”그룹으로 연결되는 과정에서 굉장히 큰 폭의 세대교체를 겪었다는 것이 내가 본 사실이다. 또한 당시의 노사모로 상징되던 세력도, 또 지금의 친노 세력도 리버럴로 규정하기에는 많이 어려운 감성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초기의 노사모에는 매우 진보적인 성향의 구성원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었으나 노무현 당선이후 그들은 거의 대부분 노사모에서 빠져나가게 된다. 또 탄핵정국 이후 대규모로 새로 몰려 들어온 진보하고는 거리가 먼 다수의 세력들 역시도 열린우리당의 소멸과정을 겪으면서 대부분 해산하게 된다. 오늘날 정치권의 친노가 아닌, 일반 유권자들 중의 친노 그룹의 다수는 노무현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새롭게 정치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다수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십년이라는 세월은 한가지 집단의 형질을 그대로 보존하기에는 너무나 긴 세월이다.

그렇게 변화하는 과정에서도 각각의 그룹들, 즉 초기 노사모, 탄핵이후 노사모, 노무현의 죽음 이후의 친노들을 모두 살펴 보면 이들을 리버럴로 분류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점을 알게된다. 일단 이들은 대부분, 특정한 무엇인가로 규정할 만큼의 정치적 입장을 확실히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먼저 드러난다.

노사모 시절에도 파병 문제나 FTA 문제에 관해 집단내의 동의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부적으로 동의가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분열이 발생하지 않았던 이유는 쉽게 알 수 있다. 노무현이라는 강력한 핵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노무현이 하는 일이라면 자신의 미약한 정치적 입장은 언제든지 접거나, 바꿀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들이다. 탄핵 이후도 마찬가지이며,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을 중심으로 모여든 친노, 혹은 깨어있는 시민 그룹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즉, 이들은 자유주의자로서 자신의 자유를 강조하거나, 진보주의자로서 진보적이며 추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충분한 매력을 가진 특정 정치인을 좋아하는 팬클럽 수준의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한 평가라는 것이다.

더 비정하게 평가하자면, 아이돌 스타 주변에 모여 있는 팬클럽 만큼의 실행력이나 조직운영 능력, 조직 경험도 없는 감성적인 유권자 집단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2008년 촛불을 둘러싸고 새롭게 등장한 집단의 주도세력들이 젊은 여성들의 동호회였다는 사실도 상기해 볼 필요가 있겠다. 정치와 전혀 상관없이 운영되고 있던 그 동호회들이 과거의 노사모보다도 훨씬 더 잘 구성된 조직이었다는 점도 주목해 볼만하다.

그들은 새누리당으로 대표되는 악의 무리를 물리쳐 줄 정치적 상징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을 뿐이지, 스스로 나서서 정치적 조직을 일으키고 자신의 가용시간을 써가며 활동하고자 하는 정치적으로 능동적인 유권자들은 아니었다. 그동안 자신이 살아오면서 당해왔던 온갖 불합리와 부조리에 대해 분노하면서 그 분노를 새누리당을 상대로 쏟아 붓고 싶었던 것 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정리하자면 유시민은 리버럴이었다. 그러나 유시민이 행했던 정치실험(만약 그 과정을 실험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은 이런 정의를 갈망하는 감성적인 유권자 집단을 이끌고 이루어졌던 것이지, 이 사회에 존재하는 리버럴 집단을 정치적으로 모아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해 두자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에 리버럴들이 과연 유의미한 집단을 이룰 수 있을 수준으로 존재는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정당메이커 유시민

유시민은 두 개의 정당을 만들었다. 하나의 거대정당과 또 하나의 군소정당연합에 참여했었고 최종적으로 초미니 정당에 당적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다. 최초 개혁당(개혁국민정당)에서 시작해서 열린우리당, 그리고 국민참여당의 창당, 통합진보당에 합류, 진보정의당으로 분당하게 된 그의 정당 편력을 살펴보면 정당 브레이커라는 별명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개혁당은 히트한 상품이었다.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그 정도 숫자의 사람들이 모여 직접 당원으로 참여하고 자발적으로 당비를 내며 당을 운영했던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개혁당의 당원수는 6만,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의 숫자는 3만을 넘었었다. 민노당을 제외한다면, 군소 정당 중에는 최고 기록이 아닌가 싶다. 아니, 민노당에서도 민주노총의 지원으로 인해 생겨난 당비“만” 내는 허수당원의 숫자를 제외한다면, 한참 때의 개혁당만한 열성적인 자발적 진성당원을 거느려본 적은 없다.

비록 잠깐 등장했다 사라지긴 했지만, 이 개혁국민정당은 대한민국의 정당정치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는 데 비해 그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서 더욱 아쉽기도 하다.

그 개혁국민정당의 시작은 사실상 3김 시대의 종료와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한다. 개혁당 창당 당시에 500만원씩 모금해서 창당자금 2억원을 마련했던 40인이 있었고, 그들이 운을 떼자 마자 순식간에 몰려든 개혁당 창당의 주역들이 바로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486세대의 핵심들이었다. 이들은 87년 6.10 항쟁을 몸으로 겪은 세대이며, 자신들이 일구어낸 성과를 망쳐버린 3김에 대한 뿌리 깊은 분노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임기가 마무리됨과 동시에 새로운 세상이 올 것으로 기대를 하고 있었고,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막아서는 이회창의 한나라당과 마찬가지로 새천년민주당 역시 구시대적 정당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개혁당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정당을 만들고, 그 정당을 발판으로 기존의 정치를 완전히 뒤바꾸어 버릴 수 있다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으며, 그런 정치개혁의 아이콘으로 노무현을 주목하게 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 흐름이 분명히 존재했었다.

그러나 그런 흐름의 전부가 개혁당으로 모여든 것은 아니다. 이미 노사모 내부에서, 또 민주당 일각에서도 새로운 형태의 정당을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은 존재했었다. 그리고 상당부분 계획도 수립되어 가고 있던 와중에, 유시민의 개혁당이 가장 먼저 “동을 뜬” 셈이 되어 버린 것 뿐이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유시민이 자신들의 신당 창당 시나리오를 훔쳐다가 선수를 쳤다고 분개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의 집권과정 전후로 발생한 우리나라 정당사의 급격한 변천은 개혁당이 그대로 존속하도록 내버려 두지를 않았다. 2002년 대선 당시의 개혁당은 새천년민주당의 대선후보인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즉 다른 당의 후보를 지지한다는 조금은 기이한 결정을 내렸으며, 노무현의 당선 이후, 새천년민주당이 붕괴하면서 열린우리당이 창당되는 과정에서 열린우리당을 노무현 정당으로 간주하고 합류하고자 하는 유시민의 의지 앞에서 해산되고 말았다. 유시민의 정치실험은 개혁당에 무게가 실려 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유시민은 개혁당을 그저 징검다리에 가까운 수단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노무현이 행한 최대의 업적이 대통령 당선이었던 것과 비슷하게, 어떤 관점에서는 개혁당의 창당이야 말로 유시민이 직접 수행한 최초이자 유일하게 성공한 정치실험일 수도 있다. 비록 금방 자기 손으로 다시 해산시키면서 막을 내린 실험이지만,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욕구들을 모아내 전혀 새로운 형태의 새로운 정당을 하나 성공적으로 만들었다는 것 자체는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개혁당은 상당히 의미있는 창당을 하고서도, 용두사미가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에 대한 원인으로는 매우 다양한 것들이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가 시대의 흐름을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채고 가장 먼저 창당의 깃발을 들어 올렸던 유시민이 자신이 만든 개혁당을 앞장서서 해산시키고 열린우리당으로 둥지를 옮긴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이 이유가 가장 크다.

그러면서 유시민은 개혁국민정당이라는 초유의 정당을 만들어낸 정당 메이커라는 위치를 떠나 자신이 만든 정당을 일년 만에 깨트려 버리는 비극적인 정당 브레이커로 등극하게 된다.

잘했다 잘못했다는 평가는 하지 않겠다. 그러나 역사가 그렇게 흘러왔고, 그 흐름에서 유시민의 선택은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실패한 열린우리당

만약 대선 전에 노무현이 민주당을 버리고 개혁당으로 옮겨 왔더라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 사실 창당 시점의 개혁당에서는 그런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다. 노무현이 민주당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의원들 다수를 이끌고 개혁당으로 옮겨 올 것이라는 기대를 했던 것이다.

허황된 얘기는 아니었다. 노무현이 개혁당 창당 과정에서 보여준 호의적인 반응은 충분히 그런 기대를 가능하게 했었고, 민주당 내에서도 새우가 고래를 삼키려는 것이냐며 당황해 하기도 했던 제안이 바로 그 시나리오였던 것이다. 정말로 허황된 것이었다면 비웃고 말았겠지.

하지만 노무현은 당선 전까지는 그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실제로도 노무현의 당선에는 노사모와 개혁당으로 상징되는 그 세력과 전통적인 민주당 세력이 거의 반반씩 공헌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노무현이 당선 전에 민주당을 버렸다면, 당선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봐야 한다. 대신 이회창 대통령이 이끄는 한나라당과, 노무현과 유시민이 이끄는 야당 개혁당, 그리고 전통의 민주당이 삼각관계로 대립하는 국면이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실은 그와는 좀 다르게 흘러가고 말았다. 노무현은 민주당 당적을 유지한 상태로 대통령에 당선이 되어 버렸고, 민주당에서는 신당 창당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개혁당은 자진 해산 후 그 신당에 참여하기로 결정을 내렸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잡음이 발생했다. 결국 민주당에서 탈당한 35명의 의원들, 개혁당을 해산하고 온 유시민과 김원웅, 한나라당에서는 뛰쳐나온 독수리 오형제라는 다섯명의 의원, 이 세력들이 모두 모여 의석수 42석의 열린우리당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그리고 이 열린우리당은 탄핵국면을 거치면서 과반 의석을 점유하는 거대여당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 과정에서 수준 미달의 초선 의원들이 대거 의회에 진출했다는 사실은 모른척 눈감아주고 넘어가기로 하자.

그러니 2002년 12월에 당선된 노무현의 실질적인 임기 또한 2004년 4월의 총선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유시민의 정치 인생도 이 때부터 시작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도 그랬다. 개혁당을 창당한 뒤, 보궐선거로 국회의원 신분을 확보하긴 했으나 의회에서 특별히 뭔가를 해 내지는 못했고 탄핵 국면으로 바로 접어들면서 아수라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으니 그럴 시간도 없었다. 그리고 2004년 4월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당적으로 당선되고 나서, 그제서야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즉, 유시민의 정치 인생은 사실상 노무현과 궤를 같이 한다. 유시민은 자기만의 목표를 가지고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 정치를 했다기 보다는 노무현이 원하는 정치에 동의하고 그것을 돕고자 노력을 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거기다가 그 시간 중 상당 부분을 정치활동이나 정당개혁을 위해 쓰기보다 오히려 노무현 행정부의 일원으로 행정활동을 하느라 소비해 버리고 만다.

결과는 참담했다. 노무현 정부는 행정부로서의 역할은 나름대로 충실히 수행했다. 비록 진보나 좌파 그룹의 성에는 차지 않았겠지만, 앞뒤 정부에 비해 별로 못한 게 없다. 아니 오히려 훌륭하게 수행했던 정책들도 꽤 많다. 유시민 역시 장관으로서의 역할은 나름대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만큼 잘 수행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거듭되는 선거 참패 끝에 사라져 버리고 만다. 행정은 선방했으나 정치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열린우리당의 실패의 원인은 무엇일까?

미디어스의 한 칼럼니스트(어떤 메이저 언론에서는 한윤형 기자를 이렇게 호칭한다.)의 의견을 인용하자면, “열린우리당 창당의 오류의 핵심은 어떤 정책적 비전을 제시하지 않은 채 그저 ‘호남패권‘이라 이름 붙인 주류파를 몰아내면 개혁이 되고 표가 될 거라 믿었다는 데에 있다.”라고 한다.

노무현이 끈질기게 주장하고, 실천해 왔던 주장이 바로 지역구도 타파였고, 열린우리당 창당 목표에도 분명히 그 내용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목표에 따르고자 했던 현실적인 행동이 민주당을 포기하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 것이었다면, 그에 걸맞는 추가 조치가 따랐어야 한다. 또한 그 추가 조치라는 것은 지역구도 타파라는 목표에 걸맞는 것이어야 했고 당원과 유권자 대중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명시적인 비전이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소멸되기 전까지 그런 목표에 걸맞는 행동을 정책으로 보여준 적이 없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한윤형 기자의 판단은 옳다. 정책적 비전 제시 없이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자들을 외면했고, 그 결과 연이어 선거에서 참패하면서 열린우리당은 소멸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물론 열린우리당의 탄생 자체가 “유시민의 정치실험”은 아니다. 열린우리당은 유시민의 뜻에 따라 만들어진 정당도 아니고, 상당히 복잡하고 다양한 세력들이 모여 만들어진 정당이었으며, 유시민은 그 수많은 세력중의 작은 갈래 중 하나에 불과했다. 열린우리당은 노무현의 정치실험이라고 할 수는 있었겠지만, 유시민의 실험은 아니었다.

그리고 열린우리당은 실패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노무현이라는 걸출한 정치인이 함께했고, 탄핵을 거치면서 상대의 뻘짓으로 인한 반사이익으로 거의 지갑 줍듯이 과반의석 달성 이라는 전무후무한 성과를 올리긴 했다. 정당의 목표가 정권획득과 그를 통한 사회 변화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절반은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겨우 몇 년을 못 버티고 소멸된 정당을 성공한 정당이라 부를 수는 없는 일이다.

 

실행도 못해본 실험

어떤 실험이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를 따지기 위해서는 일단 실험을 해 봐야 한다. 모종의 이유로 실행하지도 못한 실험이 있다면 그 실험은 성공 실패 여부를 가릴 수가 없다.

비슷하게, 유시민의 정치역정 중에 실행해보지도 못한 정치실험이 하나 존재한다. 유시민의 실험이라기 보다는 노무현의 실험에 가깝지만, 노무현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개혁을 이루어 내려고 노력하던 유시민 본인도 이 실험에 대해 매우 아쉽게 생각하고 있음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흔히 “대연정”이라 부르지만, 사실상 한나라당의 협조 하에 선거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던 시도였으니 선거제도 개혁 시도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맞을 수도 있다고 본다.

애시당초 노무현이 주도하는 선거제도 개혁에 한나라당이 동의해 줄 리가 없었다는 점에서 기획 자체가 잘못된 실험일 수도 있다. 그러나 노무현은 자신의 오래된 주장인 지역구도 타파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정치의 체질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한 걸로 보인다. 그래서 대통령에게 허용된 권한으로 한나라당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해주겠다는 조건을 걸고 시도를 한 것이다.

이 제안에 대해 유시민은 선거제도 개편이 이루어질 경우, 기존의 정당들은 창조적 분열을 일으키게 될 것이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정계 개편이 진행되면서 다당제로 전환되고 연정을 기반으로 하는 안정된 국정운영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측을 설명하면서 힘을 실어 주려고 노력을 했었다.

즉, 이 문제는 어떤 정치세력이 “우리가 앞으로 이런 목표를 달성하겠다”라는 식으로 특정한 과업이나 비전을 명시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정치세력들이 각자 제시하는 다양한 비전을 들고 모여 왜곡되지 않은 유권자의 선택을 통해 민주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스템의 변화를 가져올만한 힘이 있는 세력은 현실에 없다. 즉, 노무현과 유시민은 현실세계에서는 구현 불가능한 실험을 머릿속에서 구상해서 실제로 던진 몽상가들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 역시 몽상가 기질이 있는지, 이 제안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를 하고 있다. 물론 현실을 도외시한 면이 있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논리적으로는 이것이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적인 판단에 의해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비현실적인 주장이라는 비판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무현과 유시민은 그런 제안을 실제로 했다. 그리고 거부당했다.

어떤 관점에서는 유시민이, 노무현을 통해서 이루고자 했던 정치 개혁을 위한 가장 중요한 실험은 이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실험은 성공 실패 여부를 가리기 이전에, 시도되지도 못하고 버려졌을 뿐이다.

만약 개혁당 창당에서 시작된 유시민의 정치가 노무현을 통해 열린우리당 창당이라는 단계를 거쳐 소위 말하는 대연정이라는 것을 댓가로 지불하고 근본적인 선거제도 개혁을 하는 것으로 로드맵이 짜여져 있었다면, 그 전체 과정은 실패한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실험은 실행되지도 못한 실험이었을 뿐이다. 앞으로도 당분간 어떤 정치세력도 실행하기 힘든 실험일 것이다.

여기서 그 실험이 성공했더라면 어떤 장밋빛 미래가 펼쳐졌을 지도 모른다는 그런 헛된 얘기는 하지 않겠다. 로또 당첨의 확률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하더라도 현실에서는 또 다른 엄청난 문제가 발생하면서 망가질 확률이 훨씬 높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관성에 밀려가다

열린우리당의 실패 이후, 유시민의 정치역정은 거의 관성에 밀려간 상황이라고 밖에 보기 힘들다.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유시민이 보여준 코믹한 모습들 이후, 유시민은 특유의 개성적인 정치역량을 거의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국민참여당은 애초에 실패가 예정된 정당이었다. 어떤 사람은 개혁당을 해산하고 열린우리당에 합류한 약 8천여명의 지지자들이 그대로 국민참여당으로 이어졌다고 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얘기를 하기도 하는데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

그런 분석은 시간의 흐름을 무시한 발상일 뿐이다. 2003년 당시 개혁당을 해산하고 열린우리당에 동행 입당했던 당원들은 열린우리당이 해산되는 과정에서 반수 이상이 탈당을 해 버리고, 2010년 국민참여당이 창당되던 시절에는 거의 남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오히려 그 뒤에 노무현의 장례식을 지켜보며 새롭게 합류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고, 무엇보다도 제3의 길을 가고자 했던 지역 유지들의 합류가 상당히 부정적으로 작용한 측면이 더 크다.

말이 좋아 제3의 길이지, 한나라당은 물론 민주당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던, 그러나 정치에 입문하고 싶어 하던 B급 지역 유지들이 그나마 구의원 시의원이라도 한자리 해 볼까 싶어서 찾아든 경향이 매우 강했다. 그런 사람들은 또 진보신당이나 민노당에는 무서워서라도 가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순수한 마음으로 국민참여당에 합류해서 노력하던 수많은 당원들은 이런 평가에 매우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2010년 지방선거에서 유시민에게 경기도 지사 후보로 출마할 것을 강요하던 국민참여당 내부의 분위기는 이런 배경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수도권에서 기초단체의원으로 출마했던 수많은 국민참여당 후보들이 자신의 선거운동을 지원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당의 미래나 유시민의 정치적 입장을 고려치 않고 경기도지사 출마를 원했을 뿐이고 그 욕구가 당의 의사로 표출된 것이라는 얘기이다.

결국 유시민은 등 떠밀려 경기도지사에 출마하고 예상대로 패배한다.

그 이후 있었던 2011년의 김해 보궐선거에서 국민참여당과 유시민이 보여준 이해하기 힘든 집착도 마찬가지로 설명이 가능하다. 당원이 당을 위해 복무하는 상황이 아니라, 선거에 나가고 싶은 후보자를 위해 당과 당원이 복무하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이 과정에서 유시민의 정치적 판단력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만든 당을 스스로의 책임 하에, 직접 나서서 과감하게 해산시켜 버리던 그런 모습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오히려 당을 만들었으니 당원들의 뜻에 따라 복무하는 것이 최선 아니겠냐는 원론적인 입장만 반복하게 된다. 이는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당연하고 기본적인 일이겠지만, 매우 수동적이고 책임회피적 성향이 살금살금 흘러 나오는 모습이기도 했었다. 니들이 결정했으니 나는 그냥 하기만 하겠다, 책임은 너희들에게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시점까지의 유시민은 “정치를 하기 싫어하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잘못된 통합

그렇게 무기력하게 흘러오다가 지난 총선을 앞두고서는 드디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진보 대통합에 참여하게 된다.

진보대통합은 원래 진보신당과 민노당, 사회당이 주축이 되어 시작한 일이었고, 여기에 국민참여당이 끼어든 것은 불청객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뿐이다. 당연히 참여정부를 계승하겠다고 나선 국민참여당은 진보정당들의 시각에서는 반성하고 자숙해야 할 정치집단이었지 함께 통합을 얘기할 상대는 아니었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묘한 일이 발생한다. 예상대로 진보신당 그룹은 국민참여당이 합세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면서 빠져 나갔다. 당연한 얘기지만, 민노당 그룹도 참여당의 참여를 반대하는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기 시작했다. 권영길, 천영세, 강기갑 등은 대놓고 참여당의 합류를 반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통합을 찬성하는 세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일단 진보적 가치를 고집하기 보다는 보다 대중적인 정당을 원하는 것으로 보이던 심상정과 노회찬이 진보신당을 버리고 나와 합류에 찬성을 하고 나선 것은 그나마 이해가 좀 가는 일이었는데, 놀랍게도 민노당의 간판 스타 역할을 하던 이정희가 찬성을 하고 나선 것이다.

확실하게 말해두자.

국민참여당과 민노당의 통합의 과정은 이랬다고 한다. 먼저 유시민 측에서 민노당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정희 쪽에 제안을 했고, 그 제안이 민노당 당원들에게 알려지면서 거의 어이없다는 수준의 반대가 대세를 이루던 시점에서 당내의 중론과는 달리 이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결정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이석기였다는 것이다. 그가 결정을 하자 갑자기 통합 논의는 급물살을 타게 되고, 유시민과 이정희는 책도 같이 내고 방송도 같이 하기 시작한다.

결과론적인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이 통합은 애초에 잘못된 일이었다고 봐야 한다. 참여당의 당원들과 민노당의 당원들은 애초에 결이 달라도 너무 다른 족속들이다. 만약 이들이 같은 조직 내에서 유기적으로 결합을 하고자 한다면, 양측 모두 엄청난 변화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짧은 시간내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조직이 변할 수는 없다. 또 제 아무리 굳은 결심을 하더라도 그 조직에 속해있는 그 사람들이 그렇게 변할 수는 없다.

또한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 문제도 그렇다. 참여정부는 아무리 호의적으로 봐줘도 중도 우파적인 정권이었다. FTA 문제를 봐도 그렇고, 복지에 임하는 자세도 그랬다. 그런 정권의 핵심인물이었던 유시민이 이끌고, 그런 정권을 최고의 정권으로 추억하는 사람들이 참여당 사람들인데, FTA를 반대하고 노동투쟁을 일상화 하던 사람들과 어떻게 정당을 같이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고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고 추구하는 가치가 다른 사람들이다.

각자의 정당조직을 그대로 두고 연합공천 등의 연대를 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당 통합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민주당과 야권연대를 여러차례 해 오던 민노당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외연을 넓히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고, 3%의 지지율을 넘어 원내교섭단체 구성이라는 원대한 꿈을 꾸던 시점이었기에 욕심이 눈을 가렸던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유시민의 참여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자적으로는 더 이상 전국 정당을 꾸려나갈 역량도 부족해지고 갈수록 떨어져가는 조직의 동력을 지켜보는 입장에서 다시 한번 외연을 넓혀 당의 생존을 확보하고자 하는 욕망이 판단력 자체를 흐려 버린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 결과는 전국에 생중계된 회의장의 폭력사태이며, 통합은 다시 붕괴하고 노심유 세 사람은 진보정의당이라는 마이크로 정당으로 내려앉은 상태가 되어 버렸다. 물론 통합진보당에 잔류한 사람들의 상황 역시 “그것은 알기싫다”식의 표현대로 하자면 매우 좋게 되고 말았다.

시작부터 잘못된 통합이 얼마나 처절하게 붕괴하게 되는가에 대한 역사적인 교훈사례라고 불러도 아무 이견이 없을 것이다.

 

패배선언, 그리고 은퇴

정계를 떠나겠다고 “결단”을 내렸다는 나의 표현에 대해 유시민은 이렇게 답을 했다. 그것은 결단은 아니고 아무리 잘 봐줘야 “결정” 정도라고, 결단은 스스로 희생을 선택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결단이지, 희생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탈영해 버리는 것을 결단이라 불러서는 안된다는 그의 설명은 지극히 정당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정치인생에 대해 “졌다” 라는 표현을 쓰고 있었고, “괴상한 놈 하나 왔다 갑니다.”(한겨레, 김두식의 고백)라는 자조 섞인 표현으로 자신의 정계 은퇴를 설명하고 있었다.

정치인 유시민에 대해 지지하는 사람은 여전히 적지 않다. 그의 저서는 불티나게 팔리고 있으며, 그가 가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물론 이제 정계를 떠났으니 정치적인 “지지자”들의 숫자는 급격히 줄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의 숫자는 그리 급하게 줄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지속적으로 저술활동을 하겠다고 하고 있고 열심히 강연을 다니고 있다. 그로 인해 조금은 다른 형태가 되겠지만, 유시민을 좋아하는 사람의 숫자는 오히려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반면, 정치인 유시민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게 나오지는 않을 것 같다. 그를 무책임한 정치인의 대명사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많이 존재한다. 꼭 틀린 말은 아니다. 사람들을 몰고 다니며 만들었던 정당을 해산시키고, 입당했던 정당에서 탈당하고, 또 만들었던 정당을 다른 당과 통합시키고, 그 정당을 또 분당시키고 하는 과정은 그를 지지하고 정치적으로 행동을 같이하던 지지자들에게는 분명히 무책임한 행동으로 평가될 만한 일이었다.

행정가 유시민의 입장에 대해서도 찬사 보다는 비판이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룩한 것은 잘 드러나지 않는 실무적인 일들이며, 그와 싸웠던 사람들은 아직도 피눈물 흘리며 싸우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장관시절의 유시민이 만들어낸 기초노령연금의 수혜자들인 노인 계층 중에서 유시민을 변명해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변명은커녕 그가 그런 제도를 만들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노인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리버럴 유시민은 그런 식으로 남들의 눈을 신경쓰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다가 갔다. 어떤 일은 이루었고, 어떤 일은 실패했으며,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인생을 소비하기를 거절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행하며 즐겁게 살고 싶다고 선언을 해버렸다. 더 이상 남들을 위해 복무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신에 그는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한 일을 하고, 틈나는 대로 즐거운 놀이를 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고 싶다고 한다. 거기다가 하나 더 첨가해서 “연대”도 하면서 말이다.

나는 그에 대해 정치적으로 가혹하게 비판할 수도, 또 디테일을 끌어다 대며 이 사람이 이렇게 훌륭한 일들을 많이 했다고 찬사를 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모두 다 이제는 더 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다 지난 일 아닌가.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유시민이 이제 막 시작한 인생처럼 나도 살아가는 것이다. 그와 나는 비록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오고 있지만, 일하고 놀고 사랑하고 연대하며 살겠다는 그의 결심은 이백프로 찬성하며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것뿐이다.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정계를 떠나가면서 쓴 그의 책에 담긴 회고의 내용마저도, 자신이 속한 정치적 그룹의 이해관계에 어긋나는 내용이 있다고 해서 “사실과 다른 얘기를 했다”고 조목조목 따지고 드는 그런 쪼잔한 짓은 하고 싶지 않다. 가는 사람은 좀 편하게 놔주자.

이게 전부다.

괴상한 정치인이었던 유시민은 우리 곁에 왔다가 그렇게 떠나가 버렸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정치인 유시민이 아니라 백수 유시민이다. 그가 또 어떤 괴상한 짓을 벌일지, 지켜보고 싶은 사람은 지켜보도록 하자. 지켜 보기 싫은 사람은 안봐도 된다. 누가 그런 것을 강요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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