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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재규] 서장: 프롤로그 (1)

牛公移山 (bhsaurus@gmail.com)
2019-03-14 02:2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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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근무자가 교대하러 관구실을 나서자 박 부장은 책상 위에 머리를 대고 엎드렸다. 언제나 이 시간이면 자신도 모르는 새 쌓였던 피로가 일시에 몰리는 듯, 참을 수 없이 졸음이 밀려오곤 했다.

5월도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으니 낮이면 벌써 때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차가운 새벽 기운은 막 50 고개를 바라보는 그에게는 다소 견디기 어려웠다. 꼭 나이 때문이 아니더라도 어쩐지 구치소나 교도소의 추위는 바깥보다도 항상 늦게 물러가는 느낌이었다.

박 부장뿐만 아니라 교도소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그 추위가 단지 날씨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저 남쪽의 교도소에 근무할 때도 역시 교도소 안은 어쩐지 바깥 세상과는 동떨어진 채로 유난히 겨울이 늦게 물러나고, 또 가을이면 때이른 추위가 앞서서 닥쳐오곤 하는 것이었다.

교도소가 대개 산 밑에 자리잡고 있다는 지리적 요인을 떠나서, 그 추위의 느낌은 말하자면 전방 고지의 살을 에는 추위와는 또 다른, 때로는 사람의 가슴을 섬찟하게까지 만드는 그런 으시시한 종류의 것이었다.

평생을 구치소와 교도소를 전전하면서, 수인(囚人) 아닌 수인으로 죄수들과 함께 갇혀 살아온 지난 30년의 세월 속에서 항상 그 추위를 옆에 끼고 지내왔으니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무감해질 만도 하건만, 여름을 코앞에 두고도 여전히 전신에 배어드는 추위의 느낌을 쉽게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아니, 그 느낌은 어쩌면 그가 교도관을 그만두고 난 후에도 언제까지나 숙명처럼 그의 곁에 남아 있으리라는 막연한 예감마저 드는 것이었다.

'끼리리리릭!'

갑자기 책상 위 한구석의 낡은 전화통이 비명을 지르듯 울려대기 시작했다. 음량을 최대한 낮추어놓았건만,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한 10여 년 이상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을 그 전화기는 쇳조각으로 유리를 긁을 때와 같은 요란한 금속성 울림으로 고요한 실내의 정적을 온통 뒤흔들어놓았다.

(에이, 저 놈의 벨 소리, 도대체 이 놈의 전화기는 어떻게 좀 바꿀 수 없나?)

나른한 졸음의 유혹을 산산조각 내버린 전화벨 소리에 투덜대면서도 그는 그 낡은 전화기가 50 평생 교도관을 못 면하는 자신의 신세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조건반사적으로 서둘러 수화기로 손을 뻗으려 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마침 교대를 마치고 막 관구실에 들어선 김 교도관이 먼저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2계 김인철입니다. 네? 아, 네..."

그리고는 김은 손으로 전화기의 송화구를 막고 그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부장님, 과장님이신데요..."
"과장님?"
"예, 부장님을 찾으시는데요."

박 부장은 순간적으로 의아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관구실의 경비전화는 외부전화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 즉 외부에서 걸려온 전화는 직접 받을 수가 없다. 보안과장은 분명 그가 야간 근무에 들어가기 전에 퇴근했었다. 마침 보안과 청사 앞에서 퇴근하는 그와 마주쳐 인사를 하기까지 했었는데...

김에게 전화기를 건네받은 그는 잠시 목을 가다듬고 상대방에게 대답했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네... 네... 네? 소장님실로요? 아, 네 그러지요..."

뜻밖에도 보안과장은 그에게 급히 소장실로 올 것을 명령하였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퇴근했다가 무슨 급한 일로 다시 들어온 모양이었다. 더구나 소장이 직접 그를 호출하다니.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고, 과장이 다시 들어온 용건이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나 잠깐 소장님실에 좀 다녀올 테니까 여기 지키고 있게."

그는 김 교도관에게 잠시 자리를 맡기고는 김의 궁금해하는 얼굴을 짐짓 모른 체 하면서 관구실을 나섰다. 사실은 그 자신도 영문을 알 수 없었으므로 무슨 말이든 해줄 수도 없었다.

그러나 몇 걸음 떼지 않아, 채 관구실의 문을 나서기도 전에 그는 불현듯 뇌리를 스쳐가는 예감에 부르르 몸서리를 치고 말았다.


'혹시...?'

이어서 그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는 새 이미 벽에 걸린 달력 위를 훑고 있었다.
5월 24일, 토요일.
해마다 이맘때면 사형수들의 사형 집행이 자주 있어온 시기였다.




좁고 어두운 복도는 어디로 이어졌는지 끝을 알 수 없도록 길게 늘어져, 걸어도 걸어도 계속 그 자리인 것만 같았다. 일제시대에 지어졌다는 건물이니만치 지하로 이어지는 이 복도 역시 일제시대부터는 몰라도 적어도 만들어진 지 수십 년은 족히 지났으리라 싶게 낡고 음습해 보였다.

촉수 낮은 형광등이 간간이 늘어서서 바닥을 비추고는 있었지만, 그 밝기는 앞서 걸어가는 호송 교도관의 그림자만을 더욱 음산하게 느껴지게 할 만큼 낮았다. 그래서 그런지 복도의 야릇한 어둠은 왠지 위축되어가는 그의 마음 한구석 그늘을 더한층 무겁게 내리누르는 것이었다.

얼마쯤을 걸었을까? 동서남북을 가릴 수도 없도록 좁고 꼬불꼬불한 복도를 몇 번이나 돈 끝에 마침내 앞뒤로 그를 에워싸고 걷던 교도관들이 작은 방문 앞에 멈춰섰다. 좁은 복도 양편으로 똑같은 방문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낡고 작은 나무 문틀에 굵고 투박한 쇠창살이 가로박혀 있는 그 작은 방문들은 복도를 걸으며 느낀 위축감을 여전히 간직하게 해주었다. 아마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런 느낌은 더한층 심해지리라. 그는 자꾸만 나락으로 처지는 느낌을 애써 떨쳐버리려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 교도관이 마치 T자 모양의 쇠붙이로 문을 따자 다른 교도관이 그를 돌려세우고는 익숙한 솜씨로 몸의 포승을 풀었다. 내내 염주를 쥔 채인 두 손목을 압박하던 수갑도 풀어주었으면 싶었지만 그는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잠시 몸이라도 움쭐거렸으면 시원하겠다 싶은 충동을 지긋이 눌러 참으며 그는 묵묵히 자신의 몸을 내맡긴 채로 서 있었다.

여기까지 오도록 내내 한마디 말도 없던 그들 가운데 한 명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들어가시죠..."

그리고는 그 한마디로 이제 자신이 벙어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으니 되었다는 듯이, 다시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가볍게 떠밀리듯이 방에 들어서는 순간, 이미 복도를 걸으며 익숙해졌다고 생각되었던 야릇한 습기가 왈칵 그의 코를 통해 전신으로 번져왔다. 분명 지어진 뒤로 햇볕은커녕 제대로 한 번 환기조차 하지 않았을 그 지하방은 마치 중세시대 고성(古城)의 지하 감옥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의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 서 있는 그에게 누군가 두 번째의 말을 건넸다.

"편히 쉬십시오, 그럼.."

멀어져 가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방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 방은 둘러본다는 말이 전혀 어울리지 않을 만큼, 불과 한 평이 될까말까 할 정도로 비좁았다. 물론 그토록 좁은 방안에 보통 일반 죄수들이 대여섯 명씩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알 리는 없겠지만...

좁은 방안과는 어울리지 않게도, 천장은 너무도 높아서 한 3~4미터는 넘을 듯이 보였다. 그 높은 천장 한 가운데에, 길쭉한 모양 덕분에 간신히 형광등인 줄 알아볼 만큼 파르스름한 빛의 전등이 달려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 새로운 보금자리에 대한 관심을 떨쳐버리고 가만히 바닥에 앉았다. 구석에 잘 개켜놓은 모포가 ㅡ 비록 희미한 조명이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깨끗한지 어떤지 알 수 없겠지만 ㅡ 놓여 있었지만, 그는 굳이 차가운 마루바닥 위에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그리고는 가만히 불경을 외기 시작하였다.


觀自在菩薩行深般若波羅密多時 (관재자보살행심반야바라밀다시)
照見五蘊皆空度一切苦厄 (조견오온개공도일체고액)
......


그러나 여느 때와는 달리, 나직이 반야심경을 외면 욀수록, 차츰 마음은 평정으로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 아득한 심연의 미궁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듯 더욱 어지러워만 가는 것이었다...



• 시민단체 중견활동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되도록 좀더 객관적인 주관을 가지되 독선은 배제하자..는 모토로 세상을 바라보고 고민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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