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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재규] 2장 결의 (1)

牛公移山 (bhsaurus@gmail.com)
2019-04-14 23:5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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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님! 전화 왔습니다!"

막 본관의 현관으로 나가려던 박선호의 뒤에서 누가 급히 그를 불러댔다. 본관 관리인 윤병서였다. 무슨 급한 전환가 싶어 박선호는 서둘러 관리인실로 들어섰다.

"어딘데?"
"비 에이치랍니다."

비 에이치(BH)란 블루 하우스(Blue House), 즉 청와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흔히 백악관으로 불리는 미국의 대통령 관저가 화이트 하우스(White House)라는 점에서 생겨난 정보기관끼리의 은어였다. 김재규가 찾는 게 아닌가 해서 바삐 뛰다시피 전화를 받으러 왔던 박선호는 내심 김이 새는 것을 느꼈다. 청와대라면 보나마나 경호실 전화일 테니까.

전화를 건 상대방은 바로 차지철이었다. 그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박선호에게 간략히 만찬 준비를 지시했다.

"여섯 시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벌써 네 시가 넘어선 시각이었다. 부랴부랴 박선호는 윤병서를 시켜 식당 관리인 남효주를 불러오게 했다. 남 사무관 역시 급작스런 만찬 통보에 난감해 했지만 명령인 이상 어쩔 수 없었다. 한시 바삐 부하들을 시켜 장을 보고 음식 준비를 서둘 수밖에.

그러나 정작 바쁜 것은 박선호 본인이었다. 음식 준비야 요리사에게 시키기만 하면 되지만 그에게는 더욱 중요한 업무가 남아 있었다. 바로 연회에서 대통령의 시중을 들 여자를 구하는 일이었다. 그것도 불과 두 시간 안에 각하께서 맘에 들어 할 만한 여자를 물색해와야만 했던 것이다. 밤에 대통령의 수청을 들 여자를.

보통 연회에서 대통령의 시중을 드는 여자는 두 명이었다. 말하자면 복수로 천거한 중에서 박정희가 하나를 낙점하는 식이었다. 다행이랄까,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그중 한 명을 만찬의 흥을 돋궈줄 가수로 하라는 차 실장의 특별 지시였다. 구체적으로 거명까지 하면서.

(젠장, 좀 일찍이나 일러줄 일이지...)

길거리에 여자가 넘친다고 아무나 가서 붙잡아 대령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게다가 애써 구해온 여자가 맘에 안 든다고 경호실로부터 퇴짜 맞은 적도 어디 한두 번이던가.

박선호는 벌써 1년이 다 돼가는 이 채홍사(採紅使) 노릇에 이제 진절머리가 날 만큼 신물을 내고 있었다. 어디 가서 중앙정보부 과장이라고 하면 다들 대단한 직위인 줄 알고 어떻게 줄이라도 대볼 수 없을까 해서 아양을 떨어오지만, 막상 그는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내놓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처음 옛 중학교 은사인 김재규 덕분에 중정 의전과장으로 복직됐을 때는 그야말로 하늘에 오를 듯한 기분이었는데.

(교회 집사인 내가 이 무슨 못할 짓인가...)

원래 박선호는 대령으로 해병대에서 예편한 이듬해인 74년 당시 신직수 부장 시절에 차장이던 김재규의 빽으로 중앙정보부 총무과장에 발탁되어 처음 중정에 발을 들여놓았었다. 그러나 부산분실 정보과장으로 근무 중이던 76년에 감사 나온 감찰실 조사팀의 전화를 도청한 사실이 발각돼 옷을 벗어야 했다. 그래서 한동안 호구지책으로 현대건설 사우디 현장의 안전과장으로 열사의 태양 아래서 땀을 흘리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2년 만인 78년 말에, 정보부장이 된 김재규에 의해서 다시 중정에 복직이 되었던 것이다.

박선호의 전임자는 당시 사회적으로 크게 물의를 빚었던 현대아파트 부정 분양사건에 휘말려 옷을 벗게 되었다. 그 자리에 김재규는 사우디에서 귀국 후 팔자에 없이 윤활유 장사를 하고 있던 박선호를 들어앉힌 것이다.

막상 생각지도 못했던 중정으로의 복귀가 이뤄지고 나니 박선호는 마치 지옥에서 천당으로 옮겨온 듯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막상 허울 좋은 의전과장이 사실은 대통령의 채홍사 노릇이라니...

1년 가까이 대통령의 밤 시중을 위하여 뒤치닥거리를 했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피곤과 환멸뿐이었다. 더욱이 여자들에 대한 사후 수습 과정에서 때로는 그래도 명색이 기독교 신자인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는 짓을 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어서 그로서는 자신의 업무에 늘 회의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도 격무에 지친 그는 한 달 전 김재규에게 그만두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으나, 김재규가 "자네가 그만두면 이곳을 어떡하나, 그렇잖아도 나도 요즘 몸이 안 좋아 각하께 쉬고 싶다고 말씀 드릴 참인데 조금만 더 참게. 우리 같이 나중에 어디 물 좋은 데 가서 낚시도 하고 장기도 두면서 요양이나 하세" 하며 간곡히 만류하는 바람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어쨌든 한가하게 앉아서 투덜거리고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다. 가수야 차 실장이 이름까지 거명해서 지정했으니 연락만 하면 달려올 테고, 문제는 대통령의 시중을 들 여자였다.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오면서 박선호는 번번이 급할 때마다 수완 좋게 쓸 만한 여자를 조달해주던 김 마담을 떠올렸다. 연예계의 대모로 통하는 그녀라면 신인 탤런트나 모델 중에 아직 그다지 때 묻지 않은 아가씨를 바로 불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김 마담은 마침 자리에 없었다. 박선호로서는 애가 탈 노릇이었지만, 급히 이리저리 수배해볼 밖에. 일이 일이니만치 부하를 시켜 알아보게 할 수도 없었다. 딴 데다 알아볼까,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건 전화에서야 다행히 그녀와 연결될 수 있었다.

박선호의 다급한 부탁을 흔쾌히 수락한 그녀가 수다스럽게 늘어놓는 공치사에 적당히 변죽을 올려주면서 그는 내친 김에 아울러 가수 심수봉에게도 연락해줄 것을 주문했다. 심수봉은 전에도 한 번 만찬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감미로운 콧소리로 부르는 그녀의 노래를 대통령이 맘에 들어했기에 이번에 다시 그녀를 지명해서 부른 듯했다.

한바탕 전화통을 붙잡고 진땀을 흘린 끝에 일단 용건을 마친 그는 그제서야 느긋이 소파에 기대앉아 담배를 한 개피 꺼내 물었다. 막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빠는 순간 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우선 긴장부터 되는 마음을 억누르면서 박선호는 수화기를 들었다.

"어이, 박 과장? 나야."
"누구? 정 처장?"

상대는 경호실 경호처장 정인형이었다. 자신과 함께 해병대 간부후보생 학교를 졸업한 해병대 동기였다. 원래 알고 지내는 사이이기도 했지만 각각 청와대와 중정에 근무하게 되면서부터는 업무상 자주 만날 수밖에 없어 자연히 더욱 가까워져서 서로 흉허물 없이 지내게까지 되었다.

그의 밝은 목소리를 들으며 박선호는 잠깐 동안의 긴장을 풀고 다시 느긋한 기분이 되었다.

"오늘 저녁 때 나동에서 대행사가 있다는데 연락 받았어?"
"그래, 그렇잖아도 지금 그것 때문에 한참 정신없는 참이야."
"수고 많구만, 잘 부탁해."
"부탁은 무슨. 자네도 오는 건가?"
"물론이지. 각하가 가시는데 언제 내가 안 모신 적이 있었나?"
"알았어. 그럼 이따가 보자구."

간단히 통화를 끝내고 소파에 느긋이 기댄 지 채 얼마 되지도 않아서 전화는 다시 울렸다.

(오늘 전화통에 불 나는구만...)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고는 다시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저예요 과장님."
"아, 김 마담. 어떻게 됐소?"
"호호, 어느 분 부탁이신데 어련히 안 됐을라구요? 이따 다섯 시 이십 분까지 프라자 호텔 커피숍으로 가보세요. 카운터에서 신재순이라고 찾으시면 될 거예요."
"뭐하는 앤데?"
"여대생 모델이예요."
"틀림 없는 애지?"
"아이 그럼요, 마침 운이 좋았는 줄이나 아세요. 제가 과장님 부탁 때문에 허겁지겁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세요? 덕분에 여기저기 아쉬운 소리 깨나 했으니 나중에 다 책임지셔야 되요, 아셨죠?"
"또 하나는?"
"연락은 됐는데, 아직 약속은 못 정했어요. 다른 약속을 취소시키라고 했으니까 될 거예요. 프라자로 가시면 연락해 놓을께요."

상대방의 수다에 맞춰 건성으로 몇 마디 치사를 늘어놓은 후 전화를 끊고 나서야 박선호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제 음식 준비만 체크하면 되겠군...)


 


• 시민단체 중견활동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되도록 좀더 객관적인 주관을 가지되 독선은 배제하자..는 모토로 세상을 바라보고 고민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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