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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재규] 3장 사무라이 (5)

牛公移山 (bhsaurus@gmail.com)
2019-05-16 05:5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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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규가 마음을 다져먹는 순간, 담장 모퉁이를 돌아 사내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재규는 본능적으로 꿀꺽 침을 삼키려 했지만 이미 말라붙어 버린 침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갑자기 눈앞에서 불이 번쩍하는 충격을 느끼며 재규는 휘청하고 쓰러질 뻔했다. 그의 앞으로 다가온 형사가 다짜고짜 뺨부터 올려붙인 것이다. 마사코가 비명을 지르며 그를 감싸안았다.

"칙쇼, 또 한 놈은 어디 갔나? 벽장에선 뭘 꺼냈어!"

불문곡직하고 뺨을 얻어맞은 재규는 순간 어느 정도 남아 있던 위축감이 사라지고 한 대 맞은 데 대한 팽팽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왜놈 순사라고 두려울 것 없다, 지가 뭔데 함부로 사람을 쳐?

"뭐요! 왜 때리는 거요?"

형사는 이런 맹랑한 놈을 보았나 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감히 울던 애도 그친다는 순사 앞에서 두 눈을 땡그렇게 치켜 뜨고 자신을 노려보다니, 거기다 대들기까지 해? 간땡이가 부을 대로 부은 놈이구만.

경찰이 피의자를 상대로 먼저 폭력부터 행사하는 것은 말하자면 권력의 위세를 직접 몸으로 겪게 하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직설적인 방법이었다. 상대의 기를 꺾고 겁을 주어 위축시킴으로써 이쪽의 의도대로 끌고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상대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경우에는 단순한 폭력의 행사는 별 효과가 없고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수도 있다. 형사는 바로 지금이 그런 경우라고 판단했다.

재규는 마사코의 걱정하는 눈길을 뒤로 하고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거기에는 이미 히구치도 끌려와 있었다. 조사를 받다 보니 비로소 사태의 전말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평소 히구치와 사이가 좋지 않은 누군가가 시국에 비판적인 그를 불온한 혐의가 있다고 경찰에 투서를 했던 것이다. 경찰이 찾아왔다는 연락을 받은 히구치는 미리 재규를 불러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가택수색에 대비했던 것인데, 마침 수색을 나온 형사와 맞부닥치게 되었던 것이다.

한바탕 벌인 소란에 비해 히구치 선생의 사건은 생각보다 간단히 끝났다. 경찰서에 끌려갔던 히구치는 곧 헌병대로 넘어갔다가 얼마 안 있어 바로 풀려났다.
헌병대로 간 것은 조사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재빨리 군 고위층의 연줄을 찾아 손을 쓴 덕분에 경찰에게서 그를 빼내어 군이라는 울타리로 지켜준 셈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막상 사상 서적들이 경찰의 손에 넘어갔었다면 사태는 그리 간단히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정작 히구치 본인보다 난처한 상황에 빠진 재규의 행동이 무의미하지는 않았던 셈이었다.
재규가 난처해졌다는 것은 말하자면 공무집행방해라는 구체적인 행동 때문이었다.

일단 학생이라는 신분 덕분에 재규는 히구치의 간청을 받아들인 교장의 보증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불구속 입건이 된 것이다. 풀려나자마자 재규는 곧장 항공병학교 지원서를 썼다. 물론 형규도 함께였다.

항공병학교는 육군 비행사단 소속의 준 군대격인 하사관학교. 전시에 군에 지원하는 것만큼 애국적인 행동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고, 즉 재규는 경찰의 취조를 군대 지원과 맞바꾸기로 타협했던 것이다. 학교까지 중퇴하고 황군에 지원한 애국 학생을 처벌할 만큼 재규의 혐의가 중대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와 실랑이를 벌였던 형사가 약올라 했지만 이미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기, 모든 수속을 마친 재규는 일본으로 가기 위하여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본의 아니게 급하게 서두를 수밖에 없게 되어 정작 집에는 가 보지도, 제대로 연락을 하고 상의할 수도 없었다.
재규는 새삼 '열심히 공부는 하는데 졸업장은 하나도 몬 받고, 사람을 해치게 될 상이니 아예 무관을 시키라 카더라'던 아버지의 말을 기억해냈다.



열차가 출발하자 재규는 비로소 그동안 내내 궁금했던 일을 물어보았다.

"선생님, 그 책들은 우야케 된 깁니꺼?"

형규도 그 일이 못내 궁금했던 듯 눈을 반짝이며 히구치의 입을 주시하고 있었다. 히구치는 그들을 전송할 겸 같이 열차를 타고 부산까지 가 주기로 한 참이었다.

"왜, 가네모도 네 눈에도 내가 공산당 같이 보이나?"
"아입니더, 선생님이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좀 뜻밖이라서예."

히구치의 시선이 허공으로 떠올라 창밖 멀리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추억이라도 더듬는 듯한 표정이었다. 둘은 조용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히구치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그들 둘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건... 말하자면 내 젊은 날의 상처 같은 거다...
들어보았는지 모르겠다만, 흔히 그런 말들을 하곤 한다. 젊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안 되어본 놈은 바보고, 늙어서까지 마르크스주의자인 놈은 등신이라고...
한때는, 그러니까 내가 사관학교에 들어가기 전,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나는 좌익 독서회에 들어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주의자도 못 되고, 그냥 얼치기에 불과했을 뿐이었지만 그때는 정말 진지하고 심각했었다.
아무튼 그때는 러시아에서, 그러니까 지금의 소비에트 연방이지, 막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직후였고, 또 지금도 전쟁 중이지만 그때도 전쟁의 와중이어서 뭐랄까 사상의 혼란, 뭐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그 독서회는 남학생들 말고 여학생들도 몇이 있었는데, 그 중에 마사코라는 여학생이 하나 있었다."
"마사코요?"
"그래, 내 첫사랑인 셈이었지..."


재규와 형규의 눈길이 서로 부딪친 것과 동시에 히구치의 입에 쑥스런 미소가 슬며시 떠올랐다.

"그러다가 학교 당국에 발각되어 주동자는 퇴교 조치에 구속까지 당하고, 다른 사람들도 무거운 징계를 당하게 되었다.
나도 사실 징계를 당할 위기에 있었는데, 반성문에다가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각서를 쓰고 간신히 정학은 면하게 되었지.
사실 나는 진작부터 무슨 주의자가 되는 일이 나한테는 체질에 맞지 않는 것 같아 고민하던 참이었거든.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와는 이별을 고하게 되었지만, 덩달아 마사코와도 이별을 고하게 되어 버렸다. 퇴교 당한 그녀는 더한층 열성적으로 좌익운동에 뛰어들었고, 나는 사무라이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사관학교에 진학했으니까."
"그 마사코란 분이...?"


궁금증을 참지 못한 형규가 불쑥 끼어들어 물었다. 재규가 생각하기에도 그 이름을 따서 딸의 이름을 지었다면 보통 사이는 아니었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히구치의 이야기는 서서히 스스로의 추억에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아내가 죽고, 마사코를 데리러 내지로 건너갔다가 그녀의 소식을 들었다. 좌익 사건으로 체포돼 있다고. 그때까지 그녀는 독신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재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옥사해 버렸다. 사랑했던 두 여인이 연이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어 버린 거지.
그녀의 가족들을 통해 유품 가운데서 그 책들을 받아왔다. 용케 압수를 면한 책들인데, 어차피 가족들은 태워 버릴 셈이었으니까.
그중에는 옛날, 우리가 함께 공부했던 책들도 있었다. 그녀도 그 옛날 학창시절을 잊지 않고 있었단 뜻일까.
당시는 아직 군에서 제대하기 전이라 책들을 가지고 조선으로 건너오는 데는 별 어려움은 없었지만, 어설픈 추억으로 그 책들을 없애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던 게 그만 화근이 되어 버렸다.
어쨌든 괜히 제군들에게만 불똥이 튄 셈이 되어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두 조선인 제자 앞에서 떠듬떠듬 첫사랑을 털어놓은 히구치는 쓸쓸히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40이 넘은 그의 두 눈에 얼핏 습기가 어리는 듯해서 두 사람은 괜히 몸둘 바를 모를 심정이 되었다.
한동안 그들은 각기 저마다의 생각에 잠긴 채 기나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재규는 사실 마르크스주의가 뭔지 공산당이 뭔지 알 수 있는 기회도 없었고, 또 관심도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렇잖아도 어수선한 시국에 신세 망치기 알맞은 정신 나간 짓 정도로만 여겨왔었다.
게다가 주변에서 공부 좀 한다는 급우들이 몇몇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쭐해하는 눈치여서 그에 대한 반감 같은 것까지 있었다.

히구치 선생의 집에서 좌익관계 책들을 처음 보았을 때 어쩌면 배신감 같은 느낌을 맛보기도 했었지만, 그는 무슨 영문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일단 히구치를 믿기로 했었다.
지금 설명을 들으면서도 그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명쾌하게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다만 어렴풋이 마사코와 같은 이름의 한 일본 여인에 대한 히구치의 애잔한 추억만이 마치 자신의 아픔인 듯한 묘한 느낌이 들었을 뿐.

기차가 대구에 닿자 그들 일행은 바로 부산행 열차로 갈아탔다. 종착역이 가까워질 무렵, 히구치는 긴장한 얼굴로 두 사람을 가까이 불러앉히고는 속삭이듯 당부했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반드시 지고 만다. 부디 몸조심하고 매사에 신중히 판단해서 행동하기 바란다.
군인의 길은 영광스러운 것이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지금 그 군인이 영광스럽지 못한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형규는 물론이었겠지만 재규 역시 조금은 놀라는 심정이 되었다. 하기야 평소 히구치 선생의 태도로 볼 때 그리 놀라운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다 싶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그간 히구치의 영향으로 재규 역시 일방적인 전황 발표를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게 되었던 만큼 남들처럼 일본이 꼭 승리하리라는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시국이 시국이니 만치 일본이 패전하리라는 예언은 듣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두렵고 가슴이 떨리는 이야기였다.

이런저런 복잡한 감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열차는 끊임없이 기적 소리를 울려대며 남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재규는 아스란히 멀어져 가는 북쪽 하늘을 바라다보았다. 봄 날씨 같지 않게 잔뜩 구름이 덮인 저 하늘 아래 어딘가에 고향집이 있을 것이었다.

보고 싶은 어머니, 아버지와 동생들. 그리고 그보다 더 멀리 북쪽으로, 이제는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청춘의 추억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 시민단체 중견활동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되도록 좀더 객관적인 주관을 가지되 독선은 배제하자..는 모토로 세상을 바라보고 고민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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