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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재규] 4장 거사 (1)

牛公移山 (bhsaurus@gmail.com)
2019-05-20 13: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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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서 나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차지철이 김재규를 꼬나보며 쏘아붙였다.

"요즘 정보부는 도대체 뭐하는 덴지 모르겠어. 부산사태만 해도 그렇지요. 정보 수집도 제대로 못 하고..."

아마도 그가 화장실에 가 있는 사이, 잠시 또 정국이 화제에 올랐던 모양이었다. 김계원은 또 시작인가 싶어 김재규와 박정희의 눈치를 번갈아 살폈다.
김재규는 무겁게 굳어 있는 얼굴 그대로였고, 박정희가 무슨 한마디를 할 것 같아 얼른 말꼬리를 돌렸다.

"뉴스 시간이 됐을 텐데..."

그러자 차지철이 시계를 보더니 곧바로 일어나서 김재규와 김계원의 뒤를 돌아 반대편에 놓여 있던 TV를 켰다. 화면이 밝아지자 마침 7시뉴스가 막 시작되는 참이었다.
첫 소식은 당연히 대통령의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참석 뉴스였다. TV 화면 가득히 아스란히 삽교천 방조제가 펼쳐졌다.

"대단한 역사였습니다. 옛날 말로 하면 10리가 되는 거리 아닙니까."
"TV로 보니까 아까 같은 실감은 안 나는군요. 화면이 작아서 그런가?"
"건설부랑 충남 지사가 수고가 많았어. 농수산부도 애 많이 썼고."

박정희와 참석자들이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으면서 자연스레 뉴스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박정희는 옆에 앉은 여대생에게도 삽교천 방조제에 대한 느낌을 묻고, 대단해 보인다는 대답에 흐뭇해 했다.

모두들 새로운 화제에 빠져 있는 사이, 오직 한 사람만이 굳게 다문 입술로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특별히 그의 침묵을 의식하고 있지 않았다.

화면이 바뀌면서 박정희의 얼굴이 커다랗게 클로즈업되었다.

"인류의 역사는 자연의 악조건을 억세게 극복하면서, 동시에 자연의 은혜를 슬기롭게 활용해온 투쟁과 적응의 발자취였습니다. 동서고금을 가릴 것 없이 융성했던 국민은 국토를 소중히 가꾸었고, 그것을 번영의 발판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

자신의 육성을 들으며 박정희의 안면에 흐뭇한 미소가 번져갔다. 김계원은 방송으로 듣는 대통령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리 다소 피곤한 듯이 들리는 느낌이었지만 나이가 계시니까, 하고 별 생각 없이 넘어갔다.

이윽고 준공식 뉴스가 끝나자 이어서 국내정치로 뉴스가 넘어갔다. 뉴스 진행자가 국회의 공전에 대한 언급을 시작하자 김재규는 슬그머니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뉴스를 보고 있느라 별달리 그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김계원만이 정치문제가 나오니까 입장이 곤란해 잠시 자리를 피하는구나,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만찬장을 빠져나온 김재규는 천천히 정원을 걸어 본관으로 향했다. 조금은 서늘한 저녁 공기가 숨통을 트게 해주는 것 같았다. 그 덕분인지 내내 웅웅거리던 머리가 조금은 맑아지는 듯도 싶었다.

김재규는 가만히 생각을 굴려보았다. 각하와 차지철을 제거하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죽이고 나면 어떡할 건가? 나도 같이 자결해? 아니, 그럴 수는 없다. 갑자기 각하와 경호실장, 그리고 정보부장인 자신까지 사라지게 되면 이 나라의 혼란이 너무 걷잡을 수 없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일단 일을 벌이는 이상 사후 수습까지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

그럼 어떻게? 권력을 손에 쥐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혼란을 방지하고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되살릴 수 있다.
지금 이 나라의 권력이라면 바로 중앙정보부와 군, 그리고 관료조직이다. 정보부야 내가 부장이니 내 손 안에 있고, 관료조직은 어차피 끄는 대로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갑자기 그는 바로 오늘이야말로 거사하기에는 천재일우의 기회임을 스스로 실감했다. 그렇다. 하늘의 안배였던 것이다. 바로 오늘 우연히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이 자리에 오게 하다니, 하늘이 나를 도우시는구나!
어느 새 김재규의 두 발에는 자신도 모르게 기운이 실리고 있었다.
그래, 정승화를 앞세우는 거다. 각하를 제거하고 정승화를 앞세워 계엄령을 선포하면 일단 군까지도 내 손 안에 쥘 수 있다.

벌써 본관에 도착하는 바람에 김재규의 구상은 일단 중단되었다. 그는 바로 2층 식당으로 올라갔다. 그를 본 박흥주가 서둘러 대기실에서 뛰어나왔다. 그에게 김재규가 나직이 물었다.

"정 총장 안에 있지?"
"예, 지금 2차장보님하고 식사 중이십니다."

그 대답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벌써 김재규는 식당 문을 열고 있었다.

"여어, 정 총장 이거 참 미안합니다."

너스레를 떨며 들어서는 김재규를 보고 정승화와 김정섭이 황급히 일어섰다. 정승화는 벌써 청와대 만찬이 끝났나 싶어 조금은 놀란 기분이 되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오. 모처럼 회포나 좀 풀까 했더니, 각하께서 갑자기 만찬에 참석하라고 부르시지 뭡니까. 내가 약속해놓고 다시 취소하자고 하기도 미안하고 해서."
"뭘요 괜찮습니다. 여기 김 장군하고 재미있게 지내고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정승화가 김정섭을 돌아보며 싱긋 웃자 김정섭도 조금 계면쩍은 표정으로 따라 웃었다. 김재규는 정승화가 장단을 잘 맞춰주자 내심 안심이 되었다.

"금방 끝날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어요. 내 끝나는 대로 이리 돌아오리다."

다시 한번 다짐을 마치고 나서 김재규는 옆방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집무실이었다. 방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는 침실이 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침실 안에는 작은 금고가 놓여 있었다.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간 김재규는 바로 금고 앞으로 다가갔다. 다이알을 몇 번 돌리자 금고는 힘없이 열렸다. 그 안에서 권총 한 자루를 끄집어낸 김재규는 가만히 그것을 눈앞에 들어올려 요리조리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서독제 웰터 32구경의 7연발 권총. 그가 호신용으로 늘 간직해왔던 것이었다.

언제나처럼 권총을 손에 쥔 느낌은 마치 날선 칼끝에 닿기라도 한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 속에는 동시에 야릇한 흐뭇함도 배어 있었다. 이 권총을 마지막으로 쏴 보았던 게 언제쯤이었던가.

차츰 맥박이 빨라짐을 느끼면서 그는 금고 안에서 탄창을 마저 꺼내어 권총에 장전했다. 격발 점검을 해보려다가 그는 혹시 식당에서 들리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거리로 보아 그럴 리는 없었지만, 긴장된 마음은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그는 침대 시트 속으로 권총을 쥔 손을 집어넣었다. 이어서 노리쇠를 가볍게 후퇴시켰다가 전진시켰다. 철컥 철커덕, 이상 없음을 알리는 금속성이 두 번 울렸다.

준비는 다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직접 실행하는 일뿐이다. 그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면서 권총을 바지 오른쪽 호주머니에 넣었다.
평소 권총을 넣어다닐 수 있도록 개조한 라이터 주머니에 들어간 권총은 겉으로는 약간 튀어나온 듯 만 듯 보일 뿐 특별히 눈에 뜨이지는 않았다.
그는 이번에는 집무실에서 바로 복도로 통하는 문을 열고 나왔다. 대기실에 있던 박흥주가 뒤를 따랐다.



• 시민단체 중견활동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되도록 좀더 객관적인 주관을 가지되 독선은 배제하자..는 모토로 세상을 바라보고 고민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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