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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재규] 4장 거사 (2)

牛公移山 (bhsaurus@gmail.com)
2019-05-23 03:19:17
4    

두 사람이 만찬장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박선호는 비로소 한시름을 덜 수 있었다. 이제 각하께서 잘 즐기시기만 하면 자신은 마무리만 남은 셈이었다. 맞은 편 자리의 정인형도 느긋해진 표정이었다.

"수고했네."
"수고 같은 소리 하시네. 난 모르겠으니까 앞으로 여자는 너희 경호실에서 책임져."
"이거 또 웬 심통이야. 박 과장, 그러지 말라구. 우린 뭐 좋아서 그러나. 다 실장님이 까탈스러워서 그러는 거지."

정인형이 웃으며 농조로 대꾸했고 부처장 안재송도 거들었다.

"선배님, 거 고생하시는 참에 조금만 더 참으십시요. 다 각하를 위해 이러는 거 아닙니까. 제일 궂은 일로 각하를 위해드리니 선배님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가 아니겠습니까."
"아나, 애국자 너나 실컨 해라. 난 필요없다."

기실 이런 식의 말투정은 매번 있어왔던 일이라서 오가는 말들은 얼핏 들으면 가시 돋친 것 같아도 실상은 전혀 심각한 표정 없이 웃으며 벌이는 정다운 입씨름이었다.
안재송도 그의 해병대 후배여서 중정의 박선호와 청와대 경호실 경호처장 정인형, 경호부처장 안재송 세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도 가까운 정을 느끼는 사이였던 것이다.

잠시 몇 마디 입씨름을 나누다가 안재송이 TV를 켰다. 이리저리 돌려보아도 시간이 일러서인지 모두 유치한 어린이 프로뿐이었다. 정인형이 차라리 미군방송으로 돌리라고 주문했고 안재송이 AFKN을 틀었다.

한동안 세 사람은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AFKN을 보고 있었다. 설핏 박선호가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니 일곱 시가 넘어선 시간이었다.

"참, 실장님 경호팀 출발했을까?"

박선호가 정인형을 향해 물었다.

"글쎄, 대충 출발할 시간인데, 왜?"

정인형도 힐끗 시계를 쳐다보고는 다시 TV 화면으로 눈을 돌린 채 되물었다.

"본관 식당에도 지금 손님이 와계시는데, 경호팀 오면 어디서 기다리라고 하지?"
"손님? 무슨 손님이야?"
"부장님이 원래 미리 초청하신 분들인데 오늘 갑자기 행사가 열리는 바람에 미처 취소를 못 시켰거든."

대통령의 경호나 의전상 안가에 다른 외부인이 와 있다는 사실은 굳이 문제를 삼자면 삼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박선호도 정인형도, 그 자체를 대수로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걸리는 것은 경호실장 경호팀 문제였다.

경호실은 대통령을 경호하는 곳이지만 그 안에는 별도로 경호실장을 경호하는 부서도 있다. 그들은 평소 만찬이 끝나기 전에 미리 와서 본관 식당에서 대기하곤 했었는데, 오늘은 그 장소에 육군 참모총장과 정보부의 제2차장보가 함께 식사를 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차안에서 기다리게 했다간 나중에라도 차 실장이 그 사실을 알고 괘씸한 마음을 품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때는 김재규는 물론이고 참모총장도 곤란해지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어이 재송이, 자네가 전화해봐. 올 필요 없다고."

정인형도 그런 사정을 생각했는지 먼저 안재송에게 청와대로 전화를 걸도록 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직접 하지."

마침 전화 곁에 있던 박선호는 자신이 직접 전화기를 들었다. 경호실에 연결이 되자 그는 만찬이 오래 끌 것 같으니 나중에 만찬 끝날 때쯤 다시 전화하거든 그때 오라고 말했다. 상대는 막 출발하려던 참인데, 하면서 몇 마디 툴툴거리더니 알았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끝낸 박선호가 정인형에게 퉁명스레 말을 던졌다.

"야, 그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거 이제 그만 보고 딴 데 틀지?"
"놔둬봐, 재미있는데 뭘."

TV 화면에는 국내 여기저기의 미군기지에서 상영하는 영화 프로들이 소개되고 있는 참이었다. 정과 안은 그 현란스러운 화면이 재미있는 듯 정신없이 빠져 있었다.

(쳇, 무슨 소린지 알지도 못하면서 꽤 재미도 있겠다.)

막 속으로 투덜대고 있는데 문이 빠꼼히 열리더니 식당 관리자 남효주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왜?"

문가 쪽에 앉아 있던 박선호가 물었다.

"아뇨, 부장님이 조금 전에 나가셨는데 안 들어오시길래 여기 계신가 하고요."
"부장님이?"
"예, 한 5분 됐는데 모르셨어요?"
"그래?"

각하랑 식사 중에 어딜 가셨을까? 무슨 일이 생겼나? 안가 책임자로서 그는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한번 나가봐야겠다, 생각하면서 박선호는 나동 건물을 나섰다.
밖은 벌써 깜깜한 어둠이었다. 서쪽 하늘 인왕산 꼭대기엔 아직 달이 채 넘어가지 않고 걸려 있었지만, 밝은 데서 막 밖으로 나오니 주위의 윤곽이 잘 분간되지 않았다.

플래시를 들고 나동 주변을 한 바퀴 돈 박선호는 다시 본관 쪽으로 향했다. 본관 어구에 이르자 막 본관에서 나오던 김재규와 딱 마주쳤다. 그 뒤로 박흥주가 조금 떨어져 따라 나오고 있었다.
어쩐 일인가 물어보려는 참에 김재규가 먼저 말을 꺼냈다.

"둘 다 이리 따라와."

그들은 본관 뒤의 조명이 비추지 않는 빈터로 돌아갔다. 침실 뒤쪽의 잔디밭이었다. 건물의 그늘 속으로 들어서자 그나마 기우는 달빛조차 전혀 들지 않아 박선호는 바로 앞에 마주선 김재규의 윤곽만을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을 뿐이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김재규가 입을 열었다.

"시국이 몹시 위태하다. 나라가 잘못되면 우린 모두 죽는 거야. 오늘 내가 해치울 테니까, 방에서 총소리가 나면 너희는 경호원을 처치해라. 불응하면 사살해도 좋다."

어느 정도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그들은 어렴풋이 김재규의 열기띤 표정을 알아볼 수 있었다. 게다가 바로 가까이서 끼쳐오는 그의 호흡에 담긴 열기로 박선호와 박흥주는 자신들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똑똑한 놈 세 놈만 데리고 나를 지원해. 오늘 밤 다 해치워버린다. 각오들은 돼 있겠지?"

김재규는 말을 끝내고 찬찬히 박선호와 박흥주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오른팔과 왼팔로 여기는 두 부하였다. 박흥주는 과거 십여 년 전 군사령관 시절부터 그의 곁에서 떠나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손으로 중정에 들여놓은 옛 제자 박선호야 말할 것도 없었다.

자신이 시키면 불 속이라도 뛰어들고, 죽는 시늉이라도 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들에게 차지철을 쳐야겠다는 자신의 의중을 벌써 한두 번 내보였던 게 아니다. 이제는 자신이 더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생각을 꿰뚫고 있을 터였다.

선뜻 대답을 못하는 두 부하의 망설임을 끝내주기 위하여 김재규는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여기 참모총장과 제2차장보도 와 있어."

막상 혹시나 했던 말을 김재규의 입에서 직접 듣게 되자 박선호는 잠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지금? 여기서? 얼핏 정인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안 돼!)

차라리 다른 기회에, 다른 곳에서라면 몰라도, 친구를 죽게 할 수는 없다. 그는 애원하는 심정으로 김재규에게 말했다.

"부장님, 오늘은 경호원이 일곱 명이나 왔는데요... 다음으로 미루시죠."

경호원이 일곱 명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오늘 각하를 수행해온 경호원은 차지철을 제외하고 네 명뿐이었다. 어떻게든 김재규로 하여금 상황이 거사하기에는 어렵다는 생각을 품게 하려고 일부러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재규는 이미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안 돼. 오늘 해치우지 않으면 보안이 누설돼."
"각하도... 포함됩니까?"

다시 한번 박선호가 나직이 물었다.

"응."

김재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대답했다. 박흥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막연히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설마하고 있다가 받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잠시 셋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박흥주 못지 않게 박선호는 입 안이 바작바작 타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건가? 그는 김재규의 굳은 얼굴에서 도저히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알겠습니다... 30분만 여유를 주십시오."
"좋아, 30분. 그 전엔 절대로 행동해서는 안 돼."

말을 끝낸 김재규는 다시 한번 다짐하듯 두 사람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 눈이 마치 한 마리 야수처럼 이글이글 번득이는 듯한 착각을 잠시 박선호는 느꼈다. 벌써 등 뒤로는 식은 땀이 번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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