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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재규] 4장 거사 (3)

牛公移山 (bhsaurus@gmail.com)
2019-05-27 11: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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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가 다시 식당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박선호와 박흥주는 망연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 있었다. 사실 준비를 한다면야 넉넉잡고 한 4~5분이면 충분했다. 박선호가 말한 30분은 말하자면 마음의 준비에 필요한 시간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떻게 이 상황을 모면할 다른 수가 없을까 해서 막연히 시간 여유를 얻어보았지만, 김재규 스스로가 그만두기로 마음 먹지 않는 이상은 벗어날 길이 없었다.

박선호는 박흥주를 남겨둔 채 혼자 경비원실이 있는 건물로 걸어갔다. 김재규의 지시는 박흥주와 자신 둘에게 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어차피 자신이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박흥주는 말하자면 남산 요원이고, 지휘 체계상 궁정동에서의 병력 동원이며 기타 자질구레한 일들은 천상 자신의 몫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그는 혼란스런 판단들을 정리하려 애써 보았다. 각하까지 처치한다면, 부장님은 쿠데타라도 생각하고 계신 건가?
머릿속에서 참모총장과 2차장보가 와 있다던 김재규의 말이 윙윙대며 맴돌았다. 참모총장이 와 있다면 군이 가담한다는 말이겠고, 2차장보는 국내정치를 총괄하는 양반이니, 그렇다면 이미 사전에 다 계획된 일이란 말인가?

경비원실 앞에서 누군가가 경례를 붙였으나 박선호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여전히 머릿속은 복잡한 생각이 어지러이 몰려들 뿐이었다. 그러나 경비원 대기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면서 점차로 그 생각들은 한 가지 방향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어차피 상황을 되돌릴 수 없다면 선택은 하나뿐. 대기실의 손잡이를 잡은 채로 박선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일을 벌였다가 실패하는 것보다는 어쨌든 최선을 다해서 거사가 성공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칫하면 오히려 경호실 쪽에 당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마침 경호실장 경호팀을 오지 못하게 한 일이 그렇게 다행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이기주가 혼자 앉아 있다가 그를 보고 일어섰다. 안가 경비원 50여 명 중에서 유일한 그의 해병대 후배였다. 믿을 만한 놈을 고르자면 그를 빼놓을 수 없었다.

"가서 내 총 가져와."

그의 지시에 이기주가 무기함에서 박선호의 권총을 들고 왔다. 스미스 앤드 왓슨의 38구경 리벌버. 본래는 경찰용으로 주로 많이 쓰이지만, 언젠가 "더티 하리"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사용하는 것을 보고서부터 자신도 애용하기 시작한 권총이었다.

총을 넘겨받아 한번 훑어보면서 그는 이기주에게도 무장하라고 지시했다. 이기주는 여전히 의아스런 표정이었지만, 박선호의 심각한 얼굴을 보고는 감히 무슨 영문인지 묻지도 못하고 다시 무기함으로 가서 M15 기관단총을 들고 나왔다.

이기주만 가지고는 안 되겠고, 몇 명이나 더 붙인다? 부장님이 세 명을 뽑아오라고 하셨던가? 그는 잠시 궁리를 해보았다. 나동 대기실에 정인형과 안재송, 그리고 식당에 또 두 명이 더 있었다.

정인형은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 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은 자신이 직접 맡아서 설득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안재송은 국가대표 사격선수 출신이 아닌가. 어설피 다른 놈에게 맡겼다가는 괜히 겁먹고 그냥 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식당에는 대통령 경호원이 둘, 그리고 각하 전용차 기사가 다른 안가의 경비원들과 함께 식사 중이었다. 그들을 위협해서 한쪽으로 몰아붙이자면 실제로 세 명쯤은 필요할 것이다. 그러면? 박선호는 얼핏 자기 차 기사인 유성옥을 떠올렸다.

"유성옥이도 총 쏠 줄 아나?"
"그럼요, 육군 중사 출신인데요."
"그래? 지금 어디 있지?"
"아마 밑에 있을 겁니다."
"가서 데려와."

이기주가 기관단총을 놔두고서 방을 나갔다. 짧은 시간 동안 박선호는 소파에 눕듯이 기대앉은 채로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새삼 생각이 진전되지는 않았다. 어렵사리 내린 결론대로 밀고 나갈 수밖에.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닥쳤을까?

언뜻 떠오르는 가족 생각을 애써 털어 버리고자 그는 흠칫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이기주가 유성옥을 데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섰다. 이기주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유성옥의 얼굴도 약간은 질린 듯 굳어 있었다.

그는 이제 둘에게는 내용을 이야기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상명하복이 군대보다도 더 엄격한 중앙정보부라지만, 적어도 상황은 알아야 실수 없이 일을 처리할 게 아닌가.
그는 두 사람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이기주와 유성옥은 쭈뼛쭈뼛 다가와서는 그의 전면에 엉거주춤 멈춰섰다. 그는 굳이 다시 앉으라는 시늉은 하지 않은 채 잠시 머릿속으로 말을 골라 보았다.

"오늘 밤 경호실을 친다... 너희는 식당에 있는 놈들을 맡아. 부장님이 차 실장을 치는 동안 꼼짝 못 하게만 하면 된다. 대기실 쪽은 내가 맡을 테니까..."

짧게 말을 마친 박선호가 할 말 있느냐는 듯이 이기주와 유성옥을 바라보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을 깨뜨리고 이기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경호실쪽에서 총을 쏘면 어떡하지요?"
"같이 쏴, 사살해도 좋아."

막상 사살까지 상정한 지시를 받자 이기주와 유성옥의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변했다. 짐작은 했지만 실제상황이라는 실감이 엄청난 크기로 그들을 압박해왔기 때문이다.
더 이상 딴생각 할 여유를 주지 않겠다는 듯이 박선호가 서둘렀다.

"자, 나가자."



박선호가 말없이 가 버리자 박흥주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발길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김재규의 정보부장 전용차가 거기 세워져 있었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차 열쇠를 만지작거리면서 문을 잡아당겼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뒷좌석 문을 열고 들어가 앉아 실내등을 켰다. 평소 들고 다니던 007 가방을 열고, 그 속에서 권총을 꺼내어 가만히 살펴보았다. 어슴푸레한 실내등 불빛 아래서 웰터 38구경 9연발이 발하는 금속성 윤택은 공연히 그의 마음을 시리게 만들었다.
탄창에 실탄이 7발 장전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는 다시 불을 껐다.

잠시 어두운 차 안에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다가 박흥주는 다시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마음은 딱히 긴장한 것도 아니고, 뭐라 표현하기 힘든 심란한 상태였다.
총을 허리춤에 찬 채로 그는 천천히 걸어 본관 2층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서 불을 켰다가 그는 바로 다시 불을 껐다. 이 방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저 막연히 혼자 있고 싶었다.

문뜩 책상 속에 있는 담배를 떠올리고 그는 서랍을 열었다. 평소 자주 피우지 않는 담배였지만 가끔씩 생각날 때가 있어 넣어두었었다.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물어 불을 붙이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다시 한번 찬찬히 상황을 정리해 볼 생각이었다.

육사를 졸업하고, 중위로 진급하자마자 사단장이던 김재규를 만나 그의 부관이 된 일이 생각났다. 그리고서부터 그를 따라 항상 모시고 다녔다. 관구사령관일 때도, 보안사령관일 때도.
김재규가 예편한 후에는 한동안 헤어져(?) 있었지만, 중앙정보부장이 되자 김재규는 제일 처음 그를 불러주었다. 누가 뭐래도 자신은 김재규맨, 김재규의 사람이었다. 그가 목숨을 걸었다면 자신의 목숨도 함께 걸린 것이다.

몇 모금 빨지 않은 담배가 벌써 끝까지 다 탔는지 갑자기 어둠 속에 치지직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필터에 불이 붙은 모양이었다. 변기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담배를 던져 넣었다.

잠시 생각을 방해 당한 그는 두 번째 담배를 꺼내 물고 다시 불을 붙였다. 화장실 안이 일시에 환히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마치 숨어 있다가 들킨 것 같은 당혹감과 어둠 속에서 빛을 만난 반가움, 그렇게 상반된 두 가지 느낌을 동시에 맛보면서 그는 천천히 한 모금을 빨고 깊이 들여마셨다. 그렇게 숨을 멈춘 채로 한참을 담배 연기를 즐기다가 다시 천천히 뿜어냈다.

정승화 총장과 김정섭 중정 차장보가 온 것이 이 일 때문이었던가, 김재규의 강경한 태도로 볼 때 이미 상황은 결정된 것이리라.
평생 그는 김재규가 욱했을 때 앞뒤를 안 가리는 모습을 수 없이 보고 겪어왔었다. 그래, 부장님 성질에 그간 차 실장에게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정말 참을 만큼 참으셨지. 하지만,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만일 실패한다면?

그는 다시 한 모금을 들여마셨다. 갑자기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일을 당하면, 이제 낳은 지 6개월밖에 안 된 아들 녀석은 어떻게 되지? 학예회에서 선녀로 뽑혔다고 자랑하던 큰 딸의 모습, 아침에 출근한다고 아빠 볼에 뽀뽀를 해주던 작은 딸의 모습도 떠올랐다. 만일에 잘못되면, 아내가 애들을 데리고 잘 견뎌낼 수 있을까?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한단 말인가. 어차피 내가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 이런 자리에 처하게 된 나의 운명을 탓할 수밖에. 그것이 나의 운명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는 더 이상 고민을 계속해 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고는 다시 한번 허리춤의 권총을 만져보았다. 섬뜩한 감촉이 그의 결단을 재촉하고 있었다.

막상 밖으로 나오자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박선호는 어디 있을까? 일단 나동 쪽으로 가볼 수밖에.
과연 나동으로 통하는 쪽문 앞에서 그는 박선호와 마주쳤다. 박선호는 막 이기주와 유성옥을 식당 옆에 배치하고 만찬장 대기실로 가던 참이었다.

"난 어디서 어떻게 하지?"
"식당 옆에..."

그는 박선호가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차 한 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박선호의 서울 1 라 2578 제미니 승용차였다.

박흥주는 말없이 운전석 옆문을 열고 들어가 앉았다. 운전석에는 이미 유성옥이 먼저 앉아 있었다. 곧 이어 이기주가 뒷자리에 들어와 앉았다. 식당 상황을 살펴보고 온 모양이었다.
그는 처음 가지고 나왔던 M15 기관단총이 혹시 눈에 뜨일까봐 다시 권총으로 바꾸어 가지고 있었다.

"경호원이 모두 몇이지?"

박흥주가 뒤를 돌아보며 그에게 물었다. 자신이 듣기에도 다소 목소리가 굳어 있는 것이 어색하게 들렸다.

"서너 명쯤 됩니다. 지금 식당에서 술 마시고 있습니다."

박흥주는 불현듯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야광 바늘이 어둠 속에서 파르스름하게 깜빡이면서 7시 3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잠시 후 이기주가 유성옥에게 지시했다.

"과장님께 가서 준비 다 됐다고 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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